영화 《고스포드 파크》속 티타임의 여흥
영국의 문화 콘텐츠를 보다 보면 티타임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일상의 수다 속에서 마시는 홍차의 여유를 그대로 전달하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도 있고, 피터 래빗의 평화로운 티타임,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사건이 끝난 후 마시는 셜록 홈즈의 차 한잔도 있다.
그중에서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2001년작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속 티타임은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다.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는 제작 당시 화려한 출연진으로 주목을 받았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 각본, 감독, 미술, 의상, 여우조연상 등을 휩쓸었는데, 상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토리도 잘 짜여 있지만 볼거리도 풍요로운 작품이다.
Tea at Four. Dinner at Eight. Murder at Midnight. 정식 포스터는 아니지만 위의 세 문장이 영화의 줄거리를 잘 보여준다.
엄청난 부자인 맥코들 경이 자신의 대저택에서 여러 친지와 친구들이 모여 사냥 파티를 개최한다. 그들은 4시에 애프터눈 티를 즐기며 시시덕거리다가, 8시에 저녁 식사를 한다. 그리고 자정에 예상치 못한 비명 소리와 함께 저택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해당한 사람은 바로 저택의 주인인 맥코들 경.
예전에 애프터눈 티를 다룬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이때의 주제는 주로 날씨, 주변의 사람들 뒷담화, 돈 문제, 혹은 새로 뽑은 하녀나 하인 이야기 등이었다. 성격 나쁜 귀족 할머니 전문 배우인지 의심될 정도로 이런 캐릭터가 잘 어울리는 매기 스미스는 여기서도 위선적이고 냉담한 트랜섬 백작부인을 연기하고 있는데, 그녀는 새롭게 뽑은 하녀가 '경험이 별로 없는 어린 여자애라서 급료를 적게 주고 쓰고 있다'며 넌지시, 자랑하기도 한다.
(참고 글: 제대로 예쁘게 차려서 마셔 볼까요? / 노동자의 음료, 귀족의 음료)
꽤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는데, 배경이 되는 1930년대에 실존했던 유명 배우 '아이보 노벨로' 역할의 제레미 노덤이 여주인 실비아의 요청을 받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실제 애프터눈 티를 비롯한 디너파티에서 꽤 중요했던 것이 인기 있는 연주가를 초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현대로 치면 일종의 '유명 가수 초청 공연'같은 것으로, 뮤지션 외에도 손금을 보는 사람, 점술사, 곡예사 같은 것도 있었다고. 그러고 보면 《제인 에어》에서도 손금 보는 사람으로 변장한 로체스터가 파티 도중 제인의 마음을 떠보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인 로체스터
파티의 하객으로 초대받은 아이보 노벨로가 일종의 여흥인 공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인데, 확실히 노벨로 입장에서는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 전에도 그가 '배우'라는 이유로 여러 무례한 코멘트를 참아 넘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은 익숙하다」며 피아노 앞에 앉아 여러 곡을 연주한다. 처음에는 약간의 흥미 정도를 보이며 연주를 듣고 영혼 없이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연주가 끝없이 계속 이어지자 노골적으로 지루함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을 놀리듯 -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지만 연주를 그만해 달라고 하긴 곤란하다 - 계속 연주를 이어나간다.
아이러니한 장면에 삽입되긴 했지만, 연주곡도 매우 좋다. 제목은 The Land of Might Have Been.
https://www.youtube.com/watch?v=fpZyiSxf8Mc
티타임과 디너파티가 한창 묘사되고, 영화의 중반 너머까지도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아이보 노벨로의 연주를 듣느라 심취해 있거나 지루해하고 있던 그 무렵, 저택의 주인 맥코들 경은 서재에서 등 뒤를 칼로 찔린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허술해 보이는 경찰이 조사를 위해 저택을 방문하고, 다들 서로를 의심하거나 자신이 의심받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밤을 지새우게 된다. 그러나 그날 밤의 진실은 감추어져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다들 찜찜한 기분만을 남기고 저택을 떠나며 저택은 원래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추천인지 비추천인지 알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렸지만 《고스포드 파크》는 정말 좋은 작품이니 기회가 닿으면 보시길 :) 특히 디테일까지 신경 쓴 티테이블 세팅과 섬세하게 고증된 장식물, 소품, 의상이 조화를 이룬다.
*참고 서적: 영국 사교계 가이드, 무라카미 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