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잡고 하는 애프터눈 티테이블 세팅
※ 찻잔이 예뻐서 샀을 뿐인데, 사소하고도 중요한 다구 이야기, 가난한 자의 티테이블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처음 홍차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3단 접시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디저트들과 그에 잘 어울리는 티포트, 찻잔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예쁜 다구를 사거나 선물받게 되면 누구나 홍차를 마셔 보려고 하는데 - 물론 그러다 홍차가 취향에 안 맞아서 다구마저 당근마켓에 내놓기도 한다 - 그 때 많이 찾아 보게 되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티타임이 바로 이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애프터눈 티는 말 그대로 오후의 차 마시는 시간인데, 영국식 티문화의 정점으로 알려져 있다. 왕족과 귀족들이 즐기던 차의 방식이라는 것도 그 명성에 한 몫 했지만, 중국의 차를 오랫동안 즐겨왔던 영국이 스스로 자체적인 차 문화를 발전시켜 애프터눈 티라는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아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문에 유명한 건지도.
'애프터눈 티'는 1800년대 중반 7대 베드포드 공작부인인 '안나 마리아'가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녀가 사적으로 즐기던 습관이 사교계에 퍼지면서라고 한다.
당시 생활상을 보면, 가정용 램프가 보급되면서 밤에도 사교를 즐기게 되었고 점차 디너 타임이 늦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오후 4시 경에는 이미 출출해진 사람들이 애프터눈 티라는 형태로 간식을 즐기게 된 것.
알면 알수록 이 당시 귀족들의 생활상은 부럽기 그지 없다. 놀다 지치면 달고 맛있는 것을 갖다 주고, 또 놀다가 지치면 정찬을 차려서 오라고 부른다. 그리고 먹고 나서 또 논다!
애프터눈 티에서 종종 활용되며 2단, 혹은 3단 트레이로 불리는 테이블웨어는 일종의 케이크 스탠드이다. 그래서 외국 사이트에서 3단 트레이를 찾다 보면 'cake stand' 혹은 'three-tiered stand(tray, plate)' 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학업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고자 '3단 트레이'를 중고로 사 보겠다고 사이트를 켰는데, 순간 뭐라고 검색해야 할지 막막했던 적이 있다.
3단 트레이에 놓인 티푸드를 보면 그냥 맛있는 것은 다 모아둔 것 같지만, 그 음식의 배치에도 규칙이 있고 자세히 보면 제대로 된 가게에서는 다 그 규칙을 지키고 있다. 물론 약간의 변화나 개성을 주는 것은 테이블을 차리는 사람의 자유이지만.
먹는 순서는 제일 아래 접시부터. 하지만 가끔 디저트 중에 녹기 때문에 먼저 먹어야 하는 게 있을 수 있는데, 보통은 안내를 해 준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우선 가장 아래 접시에는 'savoury(savory)', 짭짤한 음식을 놓는다. 풍미가 있고 입맛을 돋우는 음식으로 보통 샌드위치다. 바게트나 흰빵, 크로아상 등 다양한 빵이 활용된다.
예전의 귀족들은 흰빵에 오이만 끼운 오이 샌드위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신선한 오이를 샌드위치에 넣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곧 '잘 관리된 온실을 가진 부유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그러나 지금은 오이만 넣은 샌드위치를 내놓는 경우는 거의 못 보았다. 오이 안티 클럽에서 들으면 아주 기함할 노릇
중간 접시에는 'flat', 즉 스콘 등의 빵이 놓인다. 다른 종류의 빵이라 해도 좀더 '맨숭맨숭한 맛'의 빵들이 놓인다고 보면 된다. 보통 클로티드 크림과 잼이 함께 나온다. 트레이가 좀 큰 경우에는 접시 위에 잼과 크림이 함께 있기도 한데, 보통은 테이블에 따로 세팅.
제일 위의 접시에는 'sweet treat', 달콤한 디저트류이다. 요즘의 대세는 마카롱과 티라미수, 초콜릿인 것 같다. 전통적으로 많이 나오는 것은 파운드 케이크, 쇼트케이크, 배턴버그 케이크 등이 있고 프렌치 스타일이라면 휘낭시에, 마들렌, 꺄늘레 등이 나오기도 한다.
(전혀 배고프지 않았는데 쓰다 보니 배가 고프다)
2단 트레이만 구성을 한다면 flat, sweet treat을 트레이에 놓고 샌드위치나 치즈 류는 따로 내기도 한다. 그 밖에 어떤 식으로 놓더라도 테이블 세팅하는 사람 마음이다.
디저트 중심으로 내는 경우 이 순서를 조금 바꾸기도 한다. 좀더 상큼한 디저트는 위의 접시에 놓고 상대적으로 빵에 가까운 디저트류는 아래 접시에 놓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3단 트레이 외에도 티포트와 찻잔, 각종 커틀러리(=cutlery, 포크/나이프 등)와 장식물들이 놓인다. 다만 제대로 하는 테이블 세팅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많은 이야깃거리가 나오며, 준비할 때도 즐거운 것이 이 부분이다. (제일 돈도 많이 든다..)
애프터눈 티세트는 일종의 '로망'같은 것이었다. 소녀 시절 상상했던 '여자 어른'이 즐길 수 있는 것. 동화책에 나오던 크게 부풀린 크리놀린 스타일의 드레스나, 하얀 테이블보가 깔리고 세련되게 정돈된 테이블, 잘 관리되고 싱싱한 식물들이 자라는 정원, 내 명의로 된 큰 집이라든가(음?), 고급스러운 그릇과 접시, 찻잔 등등.
그런 것들 중 하나 정도는 실현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처음 애프터눈 티세트를 감탄하며 먹었던 때가 꽤 예전이다. 스스로는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 확실히 예전과 차이가 있긴 하다. 저 세 접시 정도는 거뜬히 다 먹어치웠는데 이제는 스콘까지 먹고 나면 디저트는 조금 쉬었다가 가끔은 집에 싸 가기도 한다는 차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