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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ie Jul 27. 2020

홍차에서 화장품 향이 나요

마시다 보면 중독되는 얼 그레이의 향과 맛

화장품의 기본 향기는 보통 꽃향,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향, 우드향 등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향기로 구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어떤 것에서 '화장품 향기가 난다'고 하면 그다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먹는 음식에서 화장품 냄새 - '향기'라고 하지 않는다 보통 - 가 난다고 하면 명백히 부정적인 뜻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서는 두 가지, 사람들이 '화장품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가 '고수풀(실란트로, 샹차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얼 그레이 홍차'다.


거의 대부분의, 아니 어쩌면 모든 홍차 브랜드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홍차계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얼 그레이'는 생각보다는 호불호가 갈리는 홍차다. 그 특유의 '베르가못Bergamot' 향 때문.

베르가못은 '이태리 유자'로도 불리는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로 화장품과 향수 베이스로도 많이 사용된다. 상큼하고 쨍한 향이 나지만 동시에 그 강렬한 캐릭터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낯설 수 있다. 지금이야 과일 가향 홍차가 워낙 많기 때문에 베르가못 향이 가미된 '얼 그레이'가 그리 독특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 이 유명한 홍차에는 나름의 재미난 스토리가 있다.




'얼 그레이'는 이름 그대로 '그레이 백작(Earl)'이라는 의미인데, 유명한 영국의 정치가이자 조지아나 스펜서 부인과의 불륜으로 유명한 찰스 그레이의 이름을 땄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왔던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영화에서 이 둘의 연애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그다지 재미가 없지만 옷은 이쁨)


그레이 백작의 유명세와 함께 알려진 것도 있지만, 원래 이 홍차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중국의 랍상소우총을 비슷하게 만들어 보고자 하는 영국의 눈물겨운 노력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국과 영국이 워낙 먼데 그 배송 속도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니 영국에서 '랍상소우총이랑 비슷하게 좀 만들어 보자, 어떻게 만드는 지 알아와라'는 요구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때 '홍차에 중국 과일 용안 향을 섞어서 만든다더라'는 잘못된 카더라 정보가 영국에 입수된다. 스모커가 사랑하는 홍차에서 랍상소우총에 대해 쓴 적이 있지만, 이 차는 훈연을 입혀 그 특유의 향을 내는데 당시의 영국에는 그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용안을 유럽에서 구할 수는 없으니 비슷하게 생긴 - 사실 둘의 향과 맛은 전혀 다른데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 베르가못 향을 입혀서 가향차를 만들었는데, 그게 빅 히트한 '얼 그레이'이다.


대강 집에 굴러 다니는 얼 그레이만 모아도 이 정도다..


얼 그레이는 워낙 종류가 많으며, '레이디 그레이'나 '프렌치 얼 그레이' '스모키 얼 그레이'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기도 한다. '얼 그레이'의 강한 베르가못 향이 싫다면 좀더 시트러스 향에 가까운 트와이닝스의 '레이디 그레이'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방법. '레이디 그레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못 보았다.


실제 얼 그레이는 비슷하게 베스트+스테디셀러이자 블렌딩 차인 '잉글리시 브랙퍼스트'에 비해 좀더 귀족적인 차라는 이미지도 있다. 오후의 티타임(애프터눈 티)에서 귀족들이 많이 선택했던 차라고 한다.


이 '얼 그레이'의 정통 레시피가 어느 브랜드의 것이냐를 두고 '트와이닝스Twinings'와 '잭슨스 오브 피카딜리Jacksons of Picadilly'가 오랜 시간을 다투었다. 최초의 '얼 그레이'를 시장에 내놓은 것은 트와이닝스로 알려져 있지만 그레이 백작 2세의 레시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잭슨스가 그 정통성에 태클을 건 것. 그러나 현재 잭슨스가 트와이닝스에 인수되었기에 다 부질없는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냥 트와이닝스가 정통이다. 허무한 자본주의여




이 모든 스토리를 차치하고서라도, 얼 그레이는 제대로 한 번 마셔보기를 권하는 차다. 특히 다소 지친 오후에 기분을 확 올려주는 에너지가 있어서, 처음에는 조금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 물론 처음부터 입에 딱 맞아서 좋아하기도 한다 -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향만 맡아도 기분 좋아지는 마술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래는 추천하는 얼 그레이.


트와이닝스 얼 그레이(좌), 포트넘 앤 메이슨 스모키 얼 그레이(우)


트와이닝스의 얼 그레이 티 Earl Grey Tea

티백도 좋고, 루스 티(=잎차)도 좋다. '얼 그레이 = 트와이닝스'의 규칙을 100년 넘게 지켜 온 브랜드의 당당한 클래식 차를 느껴 보시길. 두 말이 필요 없다.

아, 한 마디만 더 보탠다면 과연 영국 브랜드라 그런지 밀크티가 매우 잘 어울린다. 클래식 얼 그레이를 제외하고 기타 가향이 들어간 경우 밀크티는 그리 맞지 않는 편.


포트넘 앤 메이슨의 스모키 얼 그레이 Smoky Earl Grey

19세기 영국인들이 만들어내려고 했던 '용안향 섞은 차로 랍상소우총과 비슷한 암튼 고급스러운 향의 좋은 차'가 바로 이 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베르가못 향도 있지만 동시에 약간의 훈연향과 함께 이국적인 느낌도 물씬 나는 홍차. 티백으로도 구할 수 있다.



TWG 프렌치 얼 그레이(좌), 쿠스미 아나스타샤(중), 마리아쥬 프렌치 얼 그레이 프렌치 블루(우)


쿠스미 티의 아나스타샤 Anastasia

러시아 인이 만들었지만 프랑스 브랜드인 '쿠스미 티'는 얼 그레이에 대한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쿠스미 티의 베스트셀러인 '아나스타샤'는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는데 - 우리로 치면 '덕혜옹주 차'랄까? - 클래식 얼 그레이에 비해 다소 가볍고 쉽게 마실 수 있다. 원래 강남역에 1호 매장을 오픈했었지만 지금은 도곡동으로 옮긴 듯 하고, 현대백화점에도 일부 매장이 있다.


마리아쥬 프레르, TWG의 프렌치 얼 그레이 French Earl Grey

개인적으로는 마리아쥬 프레르의 얼 그레이 프렌치 블루를 더 추천하고 싶지만 TWG의 프렌치 얼 그레이도 괜찮은 편이다. 꽃향을 블렌딩한 경우가 많고 콘플라워, 메리골드 등이 섞여 있어서 틴을 여는 순간 너무 예쁘다. 살 수밖에 없게 하는 매력이 있는 얼 그레이.

그렇다고 예쁘기만 할 뿐 향과 맛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살랑거리는 듯한 베르가못 향이 물씬 풍기고, 그에 이어서 부드럽고 풍성한 꽃 향기가 함께 날아오는 기분 좋은 차. 밀크티로 만들기보다는 그냥 마시는 것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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