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건물, 공간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랜드 디자인 Grand Designs》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었다. (참고글: 집 지으시려면 꼭 이걸 보세요) 전반적으로 모든 에피소드가 재미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에피소드는 시즌 10의 '급수탑 프로젝트(London Water Tower)'이다.
런던 Lambeth 지역에 있는 이 급수탑은 1800년대 중반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곳으로,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딱 봐도 우와, 싶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있고 센트럴 런던에서는 드물게 높이 지어진 건물이다.
게다가 런던 중심가에 가깝기 때문에 -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 근처이고, 한국인 유학생들도 많이 사는 엘리펀트&캐슬 지역 옆이기도 하다 - 케빈 맥클라우드와 건축주 리&그레이엄이 올라갔을 때 멀리서 빅벤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버려진 조선 시대의 봉화대를 개조해서 집을 만들려고 하는데, 올라가 봤더니 남산 타워가 가깝게 보이더라. 이런 느낌일까.
그러나 이 급수탑을 개조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인데다, 꼭대기에 있는 무거운 물 탱크를 지탱하기 위한 벽의 두께때문에 붕괴 위험에 처해 있기까지 하다. 심지어 이들은 건물을 매입하고 나서는 돈도 별로 없다! 「돈이 없어서 친구가 50만 파운드를 빌려줬죠.」 -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건축주들..
일단 오랜 세월 동안 쌓인 폐기물과 새똥을 청소해야 했다. 그리고 건물을 제대로 들여다 보니 벽돌 사이에 자란 잡초들 때문에 간격이 벌어져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벽돌을 하나하나 들어내서 잡초를 제거하고 다시 얹는 작업을 해야 했다. 시공사 직원들의 눈물이 느껴진다
건물의 가치 보존, 그리고 아름다운 복원을 위해, 최종적으로는 30억원에 가까운 돈이 들어가며 심지어 그 일을 8개월 안에 해내야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데다가 심지어 완성된다고 해도 그리 실용적이게 보이지도 않는 이 프로젝트를 도대체 왜 하려고 할까? 수많은 문제점을 지적해 주던 어떤 사람이 말한다.
그들은 이 건물과 사랑에 빠진 겁니다.
그리고, 건물도 사랑에 빠진 사람을 필요로 하죠.
나는 이 말이, 《그랜드 디자인 Grand Designs》에 나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랑에 빠진 대상은 건물이 될 수도, 땅이 될 수도, 혹은 동네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더 넓게는, 집을 사고, 집을 짓고 고치고 수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 한 눈에 반했어요. 어쩐지 이 집이 저를 당기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보자마자 이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대한 경험에 대해 고백할 때 사용하는 말들이다.
자신의 집, 공간을 사랑하고 애정을 쏟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프로그램, 《그랜드 디자인 Grand Designs》이다. 그러니 다른 시즌도 얼른 공개해 주세요 넷플릭스 :)
+ 참고로 저 급수탑은 Osborne Water Tower House이며, 유튜브 댓글을 신뢰할 수 있다면 2018년 기준으로 3백만 파운드(45억원) 이상의 가치로 매겨졌다고 한다. 아마도 2019년쯤에 매물로 나온 적이 있는 것 같지만 팔리지는 않았고, 에어비앤비로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나도 가 보고 싶다! 그러나 찾아보니 코로나때문인지 원래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내년 가을까지 예약 가능한 날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