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사 Jul 02. 2019

<보라보라 신혼여행> 이코노미, 1등석 서비스를 받다

새신랑, 목발 짚고 보라보라로 떠나다

드라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찔하다.


때는 바야흐로 결혼식 2주일 전. 여느 때와 같았던 이른 밤의 평온은 전화 한 통 후, 얼어붙었다.



이야기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 결혼이 2달이 남지 않았을 때 남편은 신혼집에 홀로 들어갔다. 이유는 집 계약을 너무 일찍 한 탓. 오피스텔 전세가 흔치 않다는 생각에 결혼 6개월 전부터 집 찾기에 열을 올렸고 딱 마음에 드는 집은 12월에 나타났다. 하필 집주인이 분양받은 아파트 잔금처리를 해야 돼 늦어도 이듬해 1월 말에는 전세금을 모두 지불해야 했고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남편이 먼저 들어가서 살기로 한 것이다.


그날따라 남편은 기분이 참 좋았다.


한참 야근에 당직에 주말 출근까지 겹쳐 결혼식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도 친구들에게 청첩장도 제대로 못 돌리던 때였는데 회사 창립일로 인해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쭉 쉬게 됐다고 웃었다. 금요일엔 친구들을 만나고 토요일엔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겠다며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보면서 재잘재잘 기분 좋게 통화했다. 바쁜 일정 탓에 점심부터 밥을 먹지 못했던 남편은 저녁 8시야 돼서야 요리를 시작했고 수육용으로 사 온 돼지고기를 칼로 잘라 두부와 같이 구워 먹을 거라며 식사 후 다시 통화하자고 전화를 끊었다. 나 역시 엄마와 TV를 보며 여유를 즐겼다.


그런데 10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따르릉 울리는 것이다. '너무 맛있어서 자랑하려고 전화했나?'라고 생각하며 단순하게 전화를 받았는데, "여보 칼이 발가락에 떨어졌어. (상처가) 좀 많이 벌어진 것 같아"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 아프다는 소리를 잘 안 하는 사람인데 “경비실에 가서 약을 받아 와야겠다”라고 했다. 나는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병원을 가라 했고, 남편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사정을 들은 엄마는 표정이 사색으로 변하며 "감이 너무 안 좋다. 택시 타고 얼른 가봐라”라고 재촉했고 나는 무작정 택시를 타고 신혼집으로 달려갔다. 가던 중 남편은 응급차를 타고 가고 있다고 다시 전화가 왔다. 피가 너무 나서 택시 탑승이 안됐던 것. 거기다가 승강기까지 갑자기 멈춰서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신혼집에서 응급차가 나온 것을 본 후 방향을 돌려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곤 도착한 병원에서 허둥지둥 남편을 찾았을 때 간이침대에 실려 온 남편이 "여보~ 나 여기 있어"라고 불렀다.



밤 9시 조금 넘었을까. 그때부터 새벽 2시까지 단순히 꿰매면 된다던 상처는 힘줄 2개가 끊어져 수술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과 남편의 기절로 마무리됐다.


하루가 천 년 같았다. 그때까지 밥도 못 먹고 하얗게 질린 남편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결혼 2주 앞두고 목발 짚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후에 고생은 말로 다 표현을 못한다. 다이어트 일절 없이 결혼식 4주 전 가봉해놓았던 드레스가 헐렁해질 정도였으니. 그래서 좋은 건 사진은 참 잘 나왔다. 예쁘게 말이다.


문제는 신혼여행이었다. 결혼식이야 버진로드를 눈 한 번 딱 감고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지만 신혼여행 내내 목발은 필수였다. 다행히 실밥을 결혼식 전날에 풀어서 물에는 들어갈 수 있었지만 20kg짜리 대형 캐리어 2개를 끌고 휠체어에 탄 남편과 남태평양 한가운데로 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이 모든 것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를 통한 축복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약자에 대한 배려는 공항, 항공사, 호텔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코노미로 표를 끊었지만 퍼스트로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 명이 앉는 자리 중 한 자리가 비는 곳을 항공사에서 미리 체크해 우리 둘만 앉아 갈 수 있게 옮겨줘 남편은 거의 누워서 뉴질랜드까지 갈 수 있었다.


또한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한 덕에 매 환승구간마다 친절한 승무원들은 휠체어를 다음 구간까지 기꺼이 밀어줬다.

보라보라 펄 비치에서도 그렇다. 누구나 내가 휠체어를 밀고 있으면 너도나도 대신 밀어주겠다고 손을 들었다. 한국에서는 집 앞 마트를 갈 때 빵빵거리는 차를 뒤로하고 높은 턱 위로 복지관에서 빌린 무거운 휠체어를 홀로 힘겹게 밀 며 혹시나 차에 치일까 봐 식은땀을 흘렸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장을 볼 때도 길을 조금이라도 막으면 짜증 섞인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휠체어를 낑낑거리며 옮겼다. 그런데 항공사와 리조트에서 제공했던 휠체어는 가볍고 견고했으며 잘 밀렸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갈 수 있게 먼저, 기다려줬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분히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비스를 베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는 다르다. 그저 척하는 것은 사람은 마음까지 감동시킬 수 없다. 매일 활짝 웃으며 “오늘도 즐겁게 보내”라고 말하는 그 따뜻한 마음 덕에 보라보라 신혼여행이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 남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충만하게 행복했다.


누군가에게 베푼 진심 어린 배려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 친절만큼 사람을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한층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