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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아이의 어른되기_어떤 믿음, 이별, 그리고 초대

서른여덟, 서른아홉

버킷리스트에 있던 '연기'를 최근에서야 배우고 있다. '나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야 용기를 냈다. 벌써 한 달이나 수업을 듣는데 수업 주제가 흥미롭다. '믿음의 힘', '나는 누구인가' 종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철학적이다. 연기할 때 대사의 전달, 표현 못지않게 배우가 주어진 상황을 실제로 믿는 것이 우선되며 중요하다는 것.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실제로 믿으라는 것. 그 믿음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면 따라가며 키우지 말고 끊어낸 후에 다시 자신이 믿고 있는 상황으로 돌아와 그저 집중하라는 것. 어떤 인물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것이 아닌, 자신도 다 알 수 없는 여러 모습의 총체인 '나로서 연기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연기'를 배우면서 자꾸 '기도'와 '신앙'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내 삶에서 나는 무얼 믿으며 살고 있는지, 누구로 살고 있는지, 나로서 살고 있는지, 삶의 오랜 질문들도 함께 올라왔다.


폭풍 같은 최근의 주요 키워드는 여전히 '엄마'와 '병원',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환자 보호자'로 살고 있다. 꼭 내 나이만큼의 신부전을 겪어낸 엄마의 심장도 힘들었는지 심부전까지 찾아왔다. 지난 입원 때 발견했지만 섬망으로 자꾸 치료를 거부하니 일단 퇴원, 집에서 회복하면서 외래로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오랜 기간 투석을 하면서 몸속 여기저기 이미 스텐트, 인조 혈관들이 들어차있고 혈압도 너무 낮아 수술도, 시술도 불가능할 수 있다는 의사 말에 겁이 났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예정대로 CT는 찍었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겨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되고 교수도 바뀌었다. 흉부외과 교수는 10-20cm 가슴을 쭉 열어 수술한다는 설명을 거침없이 해서 엄마와 아빠가 두 손을 꼭 붙잡고 울부짖는 장면을 난생처음 목격하기도 했다. mri, 인지검사, 신경과 검사들도 진행했다. 지난주에는 5일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병원을 하루에 최소 한 군데 이상 방문해야 했다. 이런 과정들로 스트레스가 심해지거나, 날씨가 안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섬망이 찾아와 엄마를 두려움으로 몰고 갔고 그 두려움의 파도는 집안 전체를 휩쓸었다.


올해 초 엄마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이렇게 갑자기 생기는 과제들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갔고 그렇게 벌써 반년이 지났다. 난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아주 초연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엄마에게 '든든한 딸' 역할을 해내고는 미사기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리에 가서야 뒤늦게 폭풍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눈물이 지나간 뒤에야 '아 힘들었구나. 버거웠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는 솔직하게 나로 서보겠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봐도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마음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매 순간 살아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부모화된 아이'로 자란 아이. 여러 해 마음을 공부하고 들여다보면서 만난 내면아이 중 하나. 낙인찍어버리고픈 마음도,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을 원망하고 싶지도 않지만, 피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나를 설명하는 것들 중 하나. 아픈 엄마의 부모역할을 연기해내야 했을까. 직업특성상 늘 부재중이던 아빠의 빈자리를 든든한 남편역할로 소화해내야 했을까. 그럼에도 누가 누군가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늘 최선을 다해 살아내도 마음 깊은 곳에는 '나는 부족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어, 내가 피해를 주고 있어.' 하는 어둠이 깊이 드리워져있는 걸 여전히 느낀다. 그리고 이 마음들은 집 안에서 뿐 아니라 내 삶의 전방위로 퍼져 어디서든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를 찌르는, 없어지지 않는 가시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내 안의 '부모화된 아이'를 만나고 부모님과의 물리적, 정서적 분리, 독립을 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점에, '내가 바라던 부모'와의 이별, 그 슬픔과 상실을 애도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때마침 부모님의 '보호자'로 아주 본격적인 초대를 받게 되었다. 준비가 덜 된 느낌, 어쩌면 물리적으로 '어른'이 된 지 이미 오래였지만 아직 '아이'인 채로 나의 오랜 결핍감이 언젠가는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또래 친구들보다 최소 10년, 아니 20년은 먼저 만나게 된 이 '생애 과제'가 처음에는, 아니 여전히 억울함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덕분에 인생의 10년, 20년 선배들과 말이 통하는 주제를 갖게 되었고 친구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좋은 점을 발견한 건 분명 나를 기쁘게 만든 일이었다.


그래도 이 이야기는 늘 어려운 이야기,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 언젠가 정리될는지도 알 수 없는 뿌리 깊은 이야기. 동시에 나를 예수님 가까이로 불러주는 이야기,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되게 해주는 별처럼 반짝이는, 소중한 이야기. 언젠가는 애써 포장하지도 상처로 남겨두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해내고 싶은 이야기, 그렇게 또 다른 빛 잃은 별들에게 힘이 될 수 있길 희망하는 이야기.


꾹꾹 눌러놓은 마음들은 결국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말다툼.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혼자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다 유튜브를 유일한 취미로 삼아 잠드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또 아픈 엄마를 두고 평생 일에만 몰두하더니 은퇴하고는 자기 취미에만 몰두하는 아빠에게 화가 나서. 나도 내 삶, 나만의 시간을 지켜내고 싶은데 누구 '때문에' 그 시간을 뺏기고 있다는 억울함까지. 그런 분노와 슬픔과 우울, 억울함을 마음에 품고 어설프게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가까이 다가서다 과거의 일들까지 고구마줄기처럼 다시 드러나고 서로 상처만 주고받으며 끝나버리는 패턴. 이제는 불혹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니 '보호자'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직도 나에게는 내 상처가 엄마, 아빠의 그것보다 크게 느껴지는 순간, 여전히 삶의 시간들을 조건 없이 나누는 것에 인색한 나를 만나게 되는 건 그리 반갑지 않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싶던 어린아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상대의 자극적인 단어선택에 격하게 반응하곤 대화 끝에선 '나는 나쁜 애야. 나 때문이야. 내가 피해를 주고 있어. 사라지자.'라는 무의식 회로가 다시 작동한다. 그저 공감과, 있는 그대로의 수용, 지지. 이런 것들을 기대했던 어린아이는 늘 실패하면서도 포기를 모르고 여전히 달려들어 사태를 악화시킨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면서 머리로 먼저 알게 된 것들 몇 가지 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적절한 감정적 물리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 내가 느끼는 부족감, 죄책감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머릿속 사고의 흐름들 중에는 내 것이 아닌 부모나 사회, 세상의 목소리가 많다는 것. 부모의 말이라도, 전문가, 권위자, 믿음직스러운 어느 누구의 말이라도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말을 믿을 것인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


믿게 된 말을 따라가면 그 말을 닮아갔다. '나는 부족해,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어, 나 때문이야. 망했어. 끝났어.'를 되뇌다 보면 어느새 실제로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갔다. 아무리 더 준비하고 열심해도 애쓴 만큼 점점 더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반대로 어떤 상황이든 '난 이미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믿을 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자신을 파괴적으로 몰아붙이며 열심을 강요하지도 않게 되고, 완벽해지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도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부정적인 말들은 힘이 세서 마음에 한번 들어오면 쉽게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지만. 매 순간의 선택에서 의식적으로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묘하게 힘이 생겼다. 그리고 이 말은 언제나 우리의 '숨'이 증명해주고 있는 '사실'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심장이 뛰고 호흡한다는 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의 사랑표현, 사랑의 증거일 테니까. 다시 한번 크게 호흡하고 떠올려 본다. 지금 여기, 오늘, 나는 어떤 말을 믿고 있나.


부모와의 연결을 잃어버린 이는 돌아갈 곳 없는 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든, 부모의 최선과는 별개로 결핍이 생겼든, 아주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도 독립하거나, 결혼하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거나, 그런 나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나이가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순간에서는 부모와의 이별을 경험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부모라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된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건 또 다른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 나를 낳아준 부모를 잃는다는 건 어쩌면 진짜 고향을 발견하고, 또 믿고, 그리로 걸어오라는 신의 초대일지도 모른다. 진짜 '어른'으로 신앞에 서는 한 걸음일지도 모르겠다.


고향 잃은 맘으로 갈 곳도 마땅찮고 머리 기댈 곳조차 없었다는 예수님께 동지애를 느끼며 달려가는 성당. 눈물이 먼저 흐르고 힘들었구나 알게 되는 시간 속으로 풍덩 뛰어들면, 드디어 숨이 쉬어졌다. '나도 돌아갈 곳이 있어', '나도 달려갈 곳이 있어', '나에게도 달려가 안길 품이 있어'. 최근의 미사에서, 기도에서,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 


기도 안에서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 21장의 갈릴레아 호숫가달렸다. 넓게 펼쳐진 물가는 아름다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있고, 그 빛깔보다 더 따뜻하게,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께로. 찰랑거리는 물가를 와다다다 달려가 와락, 포근한 그 품에 포옥 안기면 예수님의 미소가 느껴진다. 그럼 이내 진정이 되고, 위로가 되고, 다시 삶의 투쟁을 맞이할 용기가 나는 것. 말없이 그저 그 품에 안겨 있는 시간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요즘 부모님과 매 순간 이별하면서 자주 '진짜 고향'을 바라보게 된다. 돌아갈 곳을 생생하게 그려본다. 언젠가 정말 현실이 될 그 장면을 상상하며 믿으면 이미 현실이 된다. 진짜 고향을 알고, 믿고, 그 큰 존재,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것. 여전히 삐그덕 거리면서도, 매 순간의 호흡, 심장박동으로 지금 이 찰나에 날 살리는 존재에게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새로운 고향과의 만남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째 엄마가 올해를 못 넘길 것 같으다.' 평생을 들어온 이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는 아침. 이제 겨우 회복되어 가는 엄마의 컨디션이 감사하면서도 두려움이 올라오는 이유. 다음 달 심장을 치료하는 일정을 엄마가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엄마와의 이별은 평생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이 엄습하는 매 순간 난 여전히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리며 매달린다. 하느님께 깊게 뿌리내리고선 나로 단단히 서서 흔들리지 않고 엄마를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복잡하고 오묘한 애증의 관계. 아직은 서로 의존적이고 집착적이기까지 한 이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답답함, 그 속에서 계속되는 갈등과 긴장, 만나게 되는 한계들.


그리고 여전히 '그러고 있는' 나 자신도, 상대도, 어쩌면 하느님도 이제 그만 '용서'하라는 초대.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덮어줌'. 내가 '한계'라고 규정한 것들마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저 덮어주는 것. 상처를 파고들어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도려내고 싶은 순간, 멈추고, 숨 한번 크게 쉬고, 나의 고향을 향하는 것. 모든 한계들을 뛰어넘어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더욱 믿고, 그러니 한걸음을 내딛고, 나아가는 것. 그렇게 꼭 한 걸음씩만 사랑하는 것.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잘 아시는 그분을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믿고, 그래서 좀 더 닮을 수 있길. 어떤 모습이라도 그저 내어 보이고, 그 어떤 관계보다도 그 사랑을 의지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길.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유일한 결심, 내 몫이라고 지금의 나는 믿는다.  


내가 하고 있는 이별은 내 결핍을 채워줄 '내가 바라는 부모'를 기다리던 '부모화된 아이'와의 이별, 점점 내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되어가는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과의 만남. 부족함과 한계를 극복하려 애쓰던 나와의 이별,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 새로운 고향과의 만남. 매 순간 이별, 매 순간 만남. 그 미지의 여행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어도 지금 내 앞의 분명한 한 걸음씩만 그분 따라 함께 걸어내는 여정.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삐뚤빼뚤 우당탕탕.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_마르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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