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의 끝, 그의 시작

서른여덟, 서른아홉

또다시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동안 속 시끄러운 일들이 많았음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내 마음을 마주 보기 두려워 피했다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빈화면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 그래서 이 시간은 나를 위해 지켜주고 싶은 시간. 하지만 늘 오랜만인 시간. 미안하고 그리운, 또 두려운 시간. 더 '있는 그대로의 나'이고 싶은 시간.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시간.


그사이 엄마는 결국 치매약을 먹기 시작했고 심장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려 새로운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 동안 검사를 받고 나왔다. 결국 수술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기자가 많아 추석연휴 이후로 시술 일정이 잡혔다. 아빠와는 다시 이어 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 '산산조각 난 거울'로 기억되는 밤이 이어지고 있고 아빠의 암 수치는 떨어지지 않아 mri를 앞두고 있다.


이 와중에도 연기 수업은 내 삶에 생기와 영감을 주고, 세종으로의 도피는 단 며칠이라도 달디단 밤양갱보다 더 달달하다. 거저 주어지고 있다는, 이미 충분히 부어지고 있다는 '은총'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고, '애도'에 대해서, '시편'에 대해서 열린 강의들도 무려 오프라인으로 챙겨 들을 수 있었다. 바다 건너 낮밤이 다른 세상의 사람을 불러내어 이해되지도 않고 대책도 없는 이 시간들에 대해 울부짖기도 하고,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를 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셨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순간도 있었다.


그러면서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밤에는 이 세상에 몸 하나 뉘일 곳 없이 공원 벤치를 서성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1,500개가 넘는 전화번호들이 무색하게 다시 혼자인 밤. 방바닥에 산산조각 나 깨어진 거울처럼 어둠은 내게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기서 포기하라고 이게 너의 '현실'이라고 강력하게 또다시 말을 걸어온 날이 있었다. 부정적인 일들은 힘이 세서 덕지덕지 묻은 어둠을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수습이 안 되는 듯한 삶. 내 상처와 슬픔이, 이 부서짐과 연약함이 정말 누군가에게는, 언젠가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힘을 줄 수 있을까. 함께 쭈그려 앉아있는 존재가 이렇게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그에게 정말 힘을 줄 수 있을까. 여전히 난 이 모든 걸 극복해 내고선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도움을 주는 어떤 영웅을 꿈꾸는가 보다. 하지만 완벽하고 완전한 이 히어로는 내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는 것 아닐까. 내려놓는다. 부서진 채로, 망해버린, 도무지 회복 불능인 것 같은 내 삶을 그대로 그저 하느님 앞에 내려놓는다. 십자가 앞에. 그렇게 쓰러져있는 사이에도 다시 아침이, 다시 또 하루가 찾아온다. 일어난다. 그저 산다. '내 너를 살리고 있으니, 너 살아라.' 하는 그 목소리따라. 그저 하루, 또 하루, 꼭 하루씩만 살아내는 날들.


그렇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도 넘게 내게 이미 주어진 '새로운 오늘'들. 난 여전히 부들부들 떨며 용서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나에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시 주어진 '새로운 오늘'들을 사는 나는 또다시 무너지고, 살고, 다시 죽고, 다시 산다. 무너져 내린 듯, 다 끝나버린 듯한 내 삶 앞에서 내가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부서진 채로, 내 전부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저 내어드리는 것. 맡겨드리는 것. 그것뿐. 다 끝나버린 실패의 상징 십자가가 결국에는 부활과 생명의 상징이 된 것처럼, 나의 '새로운 오늘'이 먼저 나 자신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길 희망하면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와 너무나 똑같아지고 싶었던 예수님께 그러한 고난을 향한 발걸음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그만의 사명 속으로 들어가는 그 걸음 따라서. 도망치고 싶은 그때, 피하고 싶은 그곳을 향해 오히려 한발씩 나아가는 것. 언제나 그저 부르시는 곳으로 한 걸음만큼씩만 살아낼 용기를 낼 수 있길. 그러다 보면 아주 작은 것들 속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하는 때도 다시 찾아올 테니까. 끝이라고 망했다고 하는 목소리에 애써 저항하지 않고, 이겨내려 하지 않고, 그저 내 모습 그대로, 망한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나아가기. 부서진 채로 내어드린 '나의 끝'이. '그분의 영광'으로 변화되길 바라면서. 그렇게 다시 살아나 언젠가는 내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길 바라면서. '나에겐 끝. 하느님껜 시작.' 그리로 다시 한 걸음. 그렇게 '새로운 오늘'.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_루카 24,26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 아이의 어른되기_어떤 믿음, 이별, 그리고 초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