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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리

서른여덟, 서른아홉

지난해 퇴사를 앞두고 했던 건강검진에서 왼쪽 귀에 이상이 발견됐다. 높은음, 특정 헤르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 며칠 후 동네병원에서 다시 한번 정밀검사를 받고 똑같은 결과를 들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큰 소음에 노출되었거나 하는 이유로 달팽이관의 특정부위가 손상되었다고. 일시적일 수 있으니 6개월 정도 후에 다시 검사해 보자면서 그때까지는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살게 되면서부터 이동시간과 산책시간이 늘어나 그 어느 때보다도 음악과 강의와 이어폰이 늘 귀에 붙어있었지만 어떤 소리를 못 듣게 됐다는 건 충격이 컸다. 주변 사람들은 그래도 다른 귀에 이상이 없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에게 '소리'는 그렇게 별것 아닌 것이 될 수 없었다. 청각이 예민하기도 하고 나의 2-30대, 커리어의 가장 오랜 시간을 라디오와 함께했으니 특정 헤르츠라고 해도 어떤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큰 상실감을 주었다. 청력검사 박스 안에 들어가서 그 특정 헤르츠의 소리가 아무리 크게 나와도 세상은 멈춘 듯 고요한 침묵으로만 가득 찼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6개월 뒤 검사를 다시 받아보았지만 나의 왼쪽 귀로는 그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뒤늦게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이후 지난 1년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끼지 못했다.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왼쪽 귀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이동할 때, 산책할 때, 처음에는 어색하고 쓸쓸했지만 몸은 이내 적응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무한반복하며 걸으면 지금 여기가 아닌, 이 세상에 없는 어느 신성한 장소를 여행하는 것 같은 효과가 있었지만, 이어폰 없이 그저 걷고 이동할 때면 미화하거나 색칠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여기'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1년의 애도 기간을 보내고 얼마 전부터 다시 이어폰으로 음악을,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하루를 이루는 시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좀 더 좋은 소리,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을 키워주는 소리로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래놓고 몸과 맘이 가장 힘들 때는 멈추어 쉬지 못한 채 여전히 유튜브 쇼츠를 몇 시간 동안 멍 때리며 넘겨보는 것으로 도망가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이어폰을 꽂고 나의 의지를 발휘해 골라 듣는 소리들은 나를 키우는, 나를 위로하는, 나를 성장시키는 소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 40여 일은 또 여전히 기록하는 것도 사치로 느껴질 만큼 여러 일들이 지나갔다. 아빠의 mri 결과를 보고 의사는 90% 암이 확실하다는 이상한 말을 해서 다시 한번 조직검사를 기다리게 되었고, 엄마의 심장시술로 입원과 퇴원을 하는 과정에서 드라마 같은 우여곡절들이 많았다. 그 여파가 엄마에게는 인지기능 이상으로 나에게는 두 번의 호흡곤란으로 발현됐다. 살면서 처음 만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의 난이도가 매번 역대급으로 경신되었다. 최악을 상상해도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들을 만나게 되는 시간. 지난해 성탄 무렵 당시에는 무리해 다녀왔다 생각했던 30일 피정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허우적 댔을 것 같다. 물론 여전히 구렁 속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지만, 최소한 그 구렁 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은총이다.


어둠에 빠지는 패턴은 여전하다. 내가 무언가 부족하며 잘못하고 있고,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이며, 내가 상대에게, 혹은 주변에 피해를 주고 있으니 미움받고 거부당해도 싸다는 결론, 사라지는 것이 낫다는 소리. 이 소리의 뿌리는 아주 깊고 크기는 너무 세다. 내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면 더욱 세차게, 무섭게 몰아친다. 조금만 숨쉴틈을 내면 알아차릴 수 있는데도 눈앞이 깜깜하게 휩쓸릴 때가 여전히 있었다. 알고도 당하는, 눈감고 코베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아예 모르는 것보다도 더욱 괴롭게 느껴진다.


나를 살리는 소리도 또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일깨운다. '살아남아라.', '어떤 상황도 너를 훼손시킬 수 없다.', '네 안에 이미 이겨낼 힘이 있다.', '내가 함께한다 율리야.', '사랑한다 율리야.', '내가 너를 돌보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 머리로는 아는 말들, 한 번은 들어본 말들, 지극히 평범하고 뻔한, 밍밍하고 싱거운, 그런 소리들이 빨갛게 매운, 어둠의 맛보다 세다는 걸 어둠의 소용돌이를 지나오면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절대 믿기지 않더라도 그저 믿고, 그저 이 심심한 소리에 희망을 둘 뿐. 실은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는 그 외에 뾰족한 다른 방법도 없다.


또 한 번의 어둡고 캄캄한 암흑의 터널을 지나온 지금, 다시 한번 의식해 본다. 나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였나. 어느 소리를 따라가고 있나. 그 소리는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나. 어둡고 척박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같은 마음속에 싹을 틔우며 조금씩 아주 느리게 자라나고 있는 겨자씨 같이 작은 희망이, 믿음이, 사랑이, 그 소리를 먹고, 마시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기를. 그렇게 한 뼘 더 자라나기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_요한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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