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한 인간에게 정말 너무 한 것 아닌가요?" 꾹 참던 눈물이 터져버렸고 한참을 울었던 밤이 있었다. 지금도 상황이 좋진 않지만 얼마나 재수가 없을 때인가 하면 '뒤로 넘어졌는데도 무릎이 깨질 때'였다. 말 그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던 때.
눈치를 보며 변죽을 울리다가 인내심을 가지고 찬찬히 들어주던 고해 신부님에게 10년 전의 일까지 몽땅 다 털어내 버렸다. 꺼이꺼이 눈물 콧물 다 빼며 이야기를 쏟아내고 기진맥진해졌다. 이렇게 인생이 꼬이는 건 분명 내가 아주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고 신의 눈밖에 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아는 모든 죄들을 다 털어놓았으니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생각했다. 죄인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구겨져서 신부님의 말을 기다렸다. '아니 당신이 이렇게 해놓고도 신이 용서해주길 바랐나요?!'라든지,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의 인생은 이래도 마땅합니다.'라든지 아니면 화를 내고 나가라고 할 것 같았다. 교무실에 끌려온 아이처럼 잔뜩 긴장해서는 눈물을 참으며 끅끅대고 있는 나에게 신부님은 "이렇게 잘 버텨줘서 고마워요."라며 입을 떼셨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벽들이 무너져 내렸다. 내 인생을 바꾼 첫 번째 총고해의 기억이다.
영화 사일런스는 이때를 떠올리게 한다. 고통스럽고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인 것 같은 때에 대한 이야기. 아무리 믿음을 가지려 애써봐도 어둠이 침잠해오던 그 막막한 시간들을 기억하게 한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사일런스'로 개봉했다. 미국, 이탈리아, 멕시코 등지에서 2016년 11월에, 국내에서는 2017년 2월에 관객들과 만났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던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1966)'을 원작으로 봉준호 감독의 히어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영화화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1988년에 처음 원작 소설을 접했고 2007년에는 영문판의 서문을 쓰기도 했단다. 각색에만도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야기는 17세기 포르투갈 출신이자 가톨릭 예수회 신부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가 선교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선불교로 개종하고 일본인 아내를 얻어 살았던 실화를 바탕으로 시작한다. 페레이라 신부를 리암 니슨이 연기했다. 영화는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를 찾고 일본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파견된 로드리게스, 가루페, 두 젊은 신부에게 초점을 맞춘다.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일본 에도 막부시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신자들과 함께 숨어서 미사를 드리고 세례와 고해를 주며 믿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두 신부의 행보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길고 지난한 삶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신에게 답하는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신이 왜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명확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신이 우리의 고통에 침묵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들에 대해 등장인물들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신이 지금 당신의 고통에 침묵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침묵에 뭐라고 대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종교의 유무에 상관없는 질문이며, 믿음의 깊고 얕음과도 무관한 질문인 것 같다.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신의 침묵'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선택지를 골라야 할까.
영화 '사일런스' 공식 스틸컷(가운데가 기치지로)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인물은 리임니슨도 두 신부도 아닌 '기치지로'라는 인물이다. 두 신부의 길잡이 역할로 등장하는데 본인이 원해서 길잡이를 선택한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어쩌다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이런 면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는 키레네 사람 시몬도 떠오른다.
하지만 기치지로가 마음에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는 고해를 하고도 계속 죄를 저지르고, 죄를 계속 저지르면서도 꼭 돌아와 신부에게 고해를 하면서 신에게 용서를 청하는 모습 때문이다. 기치지로는 2시간 4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 동안 '응? 또?' 하는 기막힌 웃음이 절로 날 정도로 끈질기게 돌아와 신부에게 고해를 청한다. '이 얼마나 나와 비슷한가.'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종류별로 골라 짓는 죄들은 모두 나열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기치지로와 같은 끈질김은 부족한 것 아닌가. '뭐 이 정도는 봐주시겠지'하는 마음으로 넘겨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로드리게스 신부와 기치지로 계속해서 죄를 짓지만 계속해서 돌아오는 기치지로. 로드리게스 신부도 화가 날 정도로 감정이 올랐다가 결국 영화 말미에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나는 느꼈다. 신이라면 더 큰 그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우리의 어떠한 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여주지 않을까. 그렇다고 막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어둠에 떨어지더라도 기치지로처럼 끈질기게 가느다랗게 보이는 빛줄기를 향해 걸어 나오자는 말이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신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 새로운 시간을 마련해줄 테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몇 번이나 빛으로 나아와야 할까?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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