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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꺼내보는 '이스라엘, 치유의 기억'

이스라엘, 치유의 기억들

안녕하세요? 이상한 순례길의 율리입니다. 2020년 6월의 마지막 날,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하늘도 계속 뿌옇고 마음까지 회색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는 또 어떻고요. 꼭 다시 걸으러 가겠다던 산티아고 순례길은커녕, 좀처럼 줄지 않는 확진자 수 때문에 동네 모임도 조심스럽습니다. '코로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정부 발표도 머릿속을 맴돌고요.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는 어둠의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민도 길었습니다. 그리고 더듬어 찾아낸 메모, "어둠이 찾아오면 기억 속에서 희망을 뒤적여 꺼내 안고 기다려보자" 마음만큼은 회색빛으로 물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상한 순례길' 연재를 통해 나눈 것처럼 지난해는 저에게 매우 특별했습니다. 물론 매 해가 새롭게 특별하지만요. 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을에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은총의 한 해였어요. 어쩌다 보니 '3대 성지'라 불리는 곳 중 두 곳을 몇 개월 사이에 다녀왔네요. 이스라엘 성지순례야 '죽기 전에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감히 혼자 가볼 엄두는 나지 않는 왠지 무서운 곳이었고요. 창피하지만 '분쟁지역', '유태인', '이슬람' 이런 키워드를 떠올릴 수 있을 뿐 아는 것도 없어서 더 멀게만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무식자' 였던 제가 '꼭 가겠다' 마음먹게 된 건 먼저 다녀온 선배 순례자의 생생한 이야기 덕분입니다.


퇴사를 앞두고 방황하던 언젠가 함께 봉사하던 사람들과 1박 2일 워크숍을 간 적이 있어요.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한 방을 쓰게 된 친구에게 질문 하나를 했죠. "이스라엘 어땠어요?" 그 친구가 그무렵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평소 말 수가 적었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이 질문 하나에 밤을 꼴딱 새우면서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얼굴에서 환하게 빛까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에 함께 다녀온 것 처럼 생생하고 흥분되던 대화의 끝에 동이 터 올랐고 '산티아고 다음엔 이스라엘이다'라는 결심이 섰어요. 가능하다면 그 친구가 다녀온 프로그램대로 꼭 가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죠. 


사상 초유의 코로나 사태로 이제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청년성서모임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추석 연휴 7박 9일의 일정으로 이스라엘에 갈 청년순례단을 스무 명 남짓 모집하는데요. 봄부터 1-2주에 한 번씩 모여 이스라엘 성지에 대한 발표와 나눔, 기도를 하며 준비를 합니다. 


입소문을 타고 인기가 많아져서 신청도 쉽지 않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작년 1월, 신청일을 깜빡 잊고 하루가 지나 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벌써 마감된 상태였죠.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청 할 때에는 산티아고 순례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뭐 여기가 안 되어도 나에겐 산티아고가 있다'며 비교적 즐겁게 기다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왔죠. 산티아고 순례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첫 모임은 빠져야 했지만 산티아고 선배 순례자였던 지도신부님의 배려 덕분에 '정동 청년성서모임 이스라엘 성지순례단 8기'의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티아고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일까요. 환불이 가능한 마지막 날까지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상한 루트로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에 예산을 초과해서 써버린 것도 있고 어느 좋은 곳을 가도 '이상한 순례길' 이상의 감흥은 없을 거라는 교만, 새로 시작한 직장과 새로 하게 된 봉사활동의 부담감으로 끝까지 갈팡질팡했어요. 


산티아고의 기억이 아직 충만하던 때였는데도 여전히 마음속 못난이들은 열심히 활동을 하며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죠. 빠졌던 첫 모임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고 '나 빼고 다 친한 것 같아. 왠지 정이 안 가' 등의 이상한 자기 방어력을 펼치며 준비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끝까지 어색하기만 했어요. 


산티아고 40일 여행의 여독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전국을 돌며 취재하는 일정들을 소화해야 했고, 밀린 일들을 해치우고, 사람들을 틈틈이 만나며, 새로운 직장을 구해 적응해야하는 상황에, 벌여놓은 봉사활동 일정까지 겹쳐서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답답한 하루가 계속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느낌과 또 다시 삶이 돌아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멈출 수 없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선 것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매일의 출퇴근길은 다시 지옥이 되었고 다시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메모대로라면 '지옥과 더 지옥을 왔다 갔다' 했죠.


입사 전, 회사에 미리 이스라엘 순례 동안의 휴가를 양해받았기 때문에 떠날 수는 있었지만 첫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어 추석 연휴에 휴가를 붙여 일주일이나 쉬는 것이 눈치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두 눈을 꼬옥 감았습니다. 다시 생기를 잃어가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 처리를 해두고 출국 전 날 밤늦게서야 작은 여행용 가방에 짐들을 간단히 챙겼습니다. 그렇게 다시 피곤한 몸과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공항을 향했습니다. 살다보면 고민 없는 날은 많지 않지만 순례길을 떠날 땐 특히, 해결해야 할 인생의 문제가 순례의 준비물처럼 미리 마련되는 것 같습니다. 겉보기엔 좋은 조건이 분명한데도 왜 행복하지 않은 것인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다시 또 헷갈리고 혼란스러워진 마음으로 떠난 이스라엘 순례였습니다. 


순례 안에서는 성경책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흔적을 더듬다가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진한 향기를 맡기도 했고요. 나자렛, 예루살렘, 갈릴레아 호수, 카파르나움, 글로만 읽던 장소들을 '지금, 여기'로 걸어내는 것이 참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성서의 그 장소'에서 드리는 매일의 미사와 기도, 찬양도 잊을 수 없고요. 순례를 마치고는 인생의 더욱 거대한 질문에 답하며 이전의 문제는 가볍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늘 함께하고 있는 신의 흔적도 다시 한번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고요. 7박 9일, 짧지만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는 치유의 기적들과 기억들을 나누려 합니다. 


부족한 글솜씨에 엄청난 장소와 이야기들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지 여전히 걱정이 앞서지만요. 늘 그랬던 것처럼 첫 발을 떼는 작은 용기를 내어봅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 코린 12,9)"


이 말씀을 무기 삼아 다시 이스라엘로 떠납니다. 이번에도 함께 걸어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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