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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Oct 23. 2020

I love myself,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10월 21일,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개봉했습니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배우 주연에 단역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인 작품이었습니다. 배경은 1995년의 을지로에 있는 주식회사 ‘삼진전자’ 본사입니다. 회사에 다닌 지 8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신분을 드러내는 불편한 유니폼을 입고, 남들의 커피 및 담배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그 시절 여성 직장인들이 처했던 현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심 서사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토익반’이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90년대에 고졸 사원들을 대상으로 토익 강의를 했던 시나리오 작가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셋의 캐릭터가 각기 달리 매력적이며 세 사람의 케미스트리도 예고편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관전 포인트입니다. 전문 탐정도 형사도 아닌 일반 회사원들이 각자의 장기를 살려 수사를 해나간다는 것이 쾌감을 줍니다.

생산관리 3부 이자영(고아성 분), 마케팅부 정유나(이솜 분), 회계부 심보람(박혜수 분)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각자의 영어 이름인 도로시, 미셸, 실비아를 얘기하는 오프닝은 관객을 1분 만에 이 영화와 사랑에 빠져들게 합니다. 콩글리쉬와 한국어 발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600점을 넘어 대리 직급을 달겠다는 삼인방의 의지는 그들이 사내 비리를 목도하게 되면서, 조직 내 거대 권력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으로 진화합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세 히어로에게는 초능력이 있지도 않고, 그들은 차별받는 쪽이지 기득권층도 아닙니다. 그들이 낙원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 히어로가 될 수 있던 원동력은 ‘선함’에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것이 아닌, 일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이 회사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죠.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판타지인 영화는 쾌감과 승리를 추구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현실성을 반영해 일이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기도 합니다.

금붕어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면 그 물고기가 강까지 알아서 가서 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던 자영은, 내부고발자 낙인이 찍히고 나서 책상이 사무실 밖 복도에 나와 있어도 허리 펴고 자리에 앉아서 버팁니다. 일거리가 없어 바닥을 지나가는 하나의 개미를 봅니다. 그 개미는 여럿이 모여 개미군단을 이룹니다. 작고 작은 사람들이던 삼인방이 영어 토익반의 사원들과 함께 회사를 지켜내고 정의를 수호하는 것처럼요. 검은 세력의 우두머리에게 영어로 외치는 사원들의 목소리는 결단코 작지 않습니다.

레트로 느낌이 아니라, 레트로 그 자체인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스타일링은 부모님의 옛날 앨범을 참고했으며, 그것은 이솜 배우의 갈매기 눈썹과 파도치는 듯한 헤어스타일로 나타납니다. 단역 송소라 역을 맡은 이주영 배우의 비주얼도 굉장히 복고적이고요. 영화에 등장하는 지하철 티켓, 옛날 지폐 같은 소품과, 을지다방, 코리아호프 같은 역사적 장소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영화는 복고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하지만 그 시절을 살아본 사람들에겐 무례한 말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회계부의 보람은 사내 직원들의 룸살롱 영수증을 보면서 머리를 에워싸고, 마케팅부로 쫓겨나듯 옮겨진 유나는 사내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 중 하나는, 폭력을 고발하되 그것을 피해자가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룸살롱과 성추행이 등장하지만 룸살롱에 가는 장면과 성추행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한국 상업 영화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기본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2020년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잘 만든 페미니즘 영화입니다. 2020년에도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투표권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닌 것처럼, 90년대의 직장 내에서 만연하던 일들을 직시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함을 시사하는 영화입니다. 더불어 모든 여성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소녀들에게는 야망을 품으라고 얘기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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