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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Jan 27. 2021

이의영 작가의 장편소설, <페인트>

좋은 부모, 좋은 아이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에디터 SU 박서령입니다. 


여전히 코로나 19를 견뎌내는 요즘, 계절만큼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합니다. 지난여름엔 50일 장마가, 올겨울엔 함박눈이 쏟아지는 걸 보니 말입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을 텐데요. 저는 이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가족들과 자주 얼굴을 맞대고, 웃을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은 이희영 작가의 장편소설 『페인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아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좋은’이란 수식어를 흔히 사용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엄마는 좋은 엄마야.” “○○이는 훌륭한 딸이지.” 등. ‘좋은’이라는 수식어의 정확한 정의도 알지 못한 채 쉽게 말하곤 합니다. 반대로 나쁜 부모, 나쁜 자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좋은’이나 ‘나쁜’ 같은 수식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페인트』는 이러한 질문을 제일 먼저 독자에게 묻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이름표에 꼬리를 무는 무책임한 말들. 우리는 그 메시지를 『페인트』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에선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합니다. 어른이 아이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어린아이가 부모를 선택한다고? 솔직히 웃음이 나오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희영 작가는 바로 이런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깨부숩니다. 가족이라는 집단의 의무에 거론되던 ‘당연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 『페인트』는 그 모든 사랑과 관계성을 ‘선택’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이희영 작가는 부모 면접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독자에게 묻습니다. 


“좋은 부모나 좋은 자식은 무엇인가요?”
“훌륭한 가정, 따뜻한 가정은 대체 무엇인가요?” 


우리는 단번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페인트』의 주인공 이름은 제누 301입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NC센터에 들어온 순서대로 부여받는 이름입니다.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하죠. 제 이름이 박서령인 순간부터 제 정체성 역시 ‘박서령’이라는 이름 안에서 구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주인공 제누는 스스로 이름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페인트』는 주인공 제누가 자기 자신을 찾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사회적 관계로 보여줍니다. 위에서 말한 NC센터란 갓 태어난 아이들부터 열아홉 살까지, 센터에 들어온 아이들을 보호하고, 부모 면접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주는 곳입니다. 제누가 어떻게 NC센터에서 지내왔고, 어떤 부모 면접을 볼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페인트』는 가정이 없는 아이들을 시사함과 동시에, 오로지 아이들의 시선에서 이 시대의 어른들을 관찰합니다. 작가 자신이 목격해온 수많은 어른의 모습을 책 속에 풀어쓴 것이죠. 열일곱 살 제누는 독자들에게 고민이 필요한 문제들을 꼼꼼하게 짚어줍니다. NC센터를 나가기까지 약 이 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제누 301, NC센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가디들, 부모에 대한 각자 다른 신념으로 면접을 보러 오는 어른들의 이야기. 『페인트』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온갖 편견을 허물어줍니다. 우리가 미취학 아동이나 홀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수식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식어에 너무 관대해서, ‘좋은’, ‘나쁜’ 같은 수식어가 ‘부모’라는 명사를 규제하는 가장 무책임한 수단임을 간과합니다. 제누 301이 면접 본 어른들은 제누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기도 하고, 제누를 칭찬하며 그들에게 꼭 맞는 아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어른들은 좋은 부모 조건에 알맞은 걸까요? 제누는 이런 어른들의 행동을 “상품을 꼼꼼하게 살피듯”이라 표현합니다. 어른들의 그런 보여주기 식 행동은 아이들을 상품에 불과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가디는 부모 면접에 까다로운 제누에게 “NC 출신으로 살아가도 상관없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누는 “말도 안 되는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게 더 어렵다.”라고 답하죠. 이 문장은 『페인트』를 관통하는 작가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페인트』 전체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독자들이 일차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페인트』의 등장인물로는 부모 면접을 간절히 기다리며, 얼른 부모를 만나 센터를 나가고자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작가는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제누 301과 얼른 부모를 만나 나가고 싶어 하는 보편적 아이들을 설정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하고 중립적인 시선을 더욱 부각합니다. 이 책은 다소 냉정하고 투박한 문체로 쓰여 있는데요. 어쩌면 독자들은 주인공이 어른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투박한 어투가 이희영 작가의 치밀한 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독자의 시선 역시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페인트』의 등장인물들이 사회와 어른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을 간접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독자의 역할은 작가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보는 것이겠죠? 『페인트』의 제목이기도 한 ‘페인트’는 NC 출신 아이들의 신분을 물감으로 지워버린다는 뜻의 은어입니다. 어째서 아이들은 그들의 잘못도 아닌 낙인을 스스로 지워나가야 할까요? 이런 아이들은 『페인트』의 책 속에도, 우리 현실에도 만연하게 퍼진 문제입니다. 우리는 거시적 관점으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 소설의 중심적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다음은 책 속의 한 문장입니다. 



세상에 좋은 부모나 좋은 자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관계도 단 몇 가지의 수식어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는 ‘부모 면접’이라는 이야기로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에 관해 말합니다. 어른, 아이, 부모, 자식, 친구에 대하여 말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멋대로 판단할 수 없는 독립적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의 틀에 맞추기 위해 변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찾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나 자신으로서 단단해지면 됩니다. 이런 올바른 마음으로 어른이 되고 아이가 된다면, 수식어 따위 필요 없는 부모, 자식 그 자체가 될 수 있겠죠? 불편한 진실이지만, 세상의 낙인은 어디에도 존재합니다. 그 낙인과 차별을 떨쳐내기는 어렵죠. 그렇지만 낙인을 부수고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페인트는 일시적일 뿐임을 잊지 않길 바라며, 오늘의 책 소개를 마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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