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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n Jul 29. 2019

시드니 영주권 준비와 실패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있다.



아무리 절실히 바래도 무참히 실패하는 것이 있다. 억울한 마음에 누군가를 원망해봐도, 간절히 기도를 해봐도 바뀌는 것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픈 마음을 훌훌 털고 일어나 내게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다시 도전하는 것뿐이다.






시드니의 한 일본 레스토랑, 나는 그곳의 부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


일하던 카페에서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얼마 되지 않아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스폰서십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레스토랑의 부 매니저이자 셰프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미 내가 하고 있던 일에 자신이 붙었기도 하고 카페의 일을 무척 좋아했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비자를 받고 싶은 나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을 했다.


그곳의 매니저는 일본인 여자로 나이는 40대 초반, 결혼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를 미- 상이라고 불렀다. 걱정과 달리 그녀는 전에 일했던 카페의 매니저보다는 친절했고 일도 잘 가르쳐 주었다. 
나는 잠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레스토랑 일에 거의 처음과 다름없었다. 우리 사장이 가지고 있는 레스토랑들을 관리하는 유스케상께서 부 매니저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포지션의 일을 다 배워야 한다고 했다. 모든 포지션의 업무를 다 알아야 새로운 직원이 왔을 때 일을 더 잘 가르쳐 줄 수 있기도 하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도 쉽기 때문이란다.


내가 처음 하게 된 일은 접시 닦기였다. 내 몸보다 훨씬 크고 높은 두 개의 싱크가 있는 곳에 발 디딤판을 밟고 올라간 뒤 고무장갑을 끼고 접시를 닦았다. 우리 가게는 꽤 바쁜 일본 우동/소바 가게였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가게 바깥까지 줄을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다 먹은 그릇은 접시 닦는 곳까지 손님이 직접 들고 오는데, 조금만 밀려도 그릇을 놓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숨도 쉬지 않고 접시를 수거하며 닦아야 했다. 

트레이를 잡고 남은 음식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접시는 접시끼리 그릇은 그릇끼리, 일회용 젓가락은 젓가락 통에 한데 모아둔다(모아놨다가 한 번에 버려야 쓰레기 봉지가 찢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잘못 버려, 하수구가 막히기라도 하면 손을 넣어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 비누가 묻은 스펀지로 그릇과 접시를 헹군 뒤 차곡차곡 쌓아 기계에 넣는다. 기계 작동이 멈추면 그것을 한데 모아 각 포지션에 가져다준다. 

정신없이 그릇을 닦다 보면 허리도 팔도 목도 다 쑤시고 아팠다.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담긴 쓰레기를 치우는 일도 내 몫이었는데, 내 힘으로는 들기 힘들 만큼 무겁기도 했지만 가끔 잘못 들어간 젓가락에 의해 비닐에 구멍이라도 뚫리면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어느덧 일에 익숙해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점심시간에 혼자서 다 처리를 할 수 있을 만큼 빨라졌을 무렵 나는 "튀김" 포지션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포지션은 덥고, 힘들고, 위험했다. 

출근하면 튀김기의 전원을 켜고, 오픈 시간에 맞춰 튀김을 하기 시작한다. 고구마에 튀김옷을 묻혀 튀기고, 가라아게를 튀기고, 타코야키를 튀긴다. 제일 힘든 것은 에비 프라이였는데, 길게 편 새우에 튀김옷을 묻혀 한번, 두 번 튀긴 후 왼손을 이용해 집게로 새우를 잡고 다른 손으로 튀김 반죽을 묻혀 손가락의 힘을 이용해 탁탁 튀겨 튀김 가루들이 새우에 달라붙게 만든다.

길고 무거운 집게로 얇은 새우를 잡고 있는 것도 힘들뿐더러, 한 손으로 계속 기름 가까이에서 손가락을 튀기고 있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골고루, 얇고 바삭하게 튀김옷을 입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맛있고 바삭한 새우튀김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까지 실패의 실패를 거듭하며 연습하는 동안 손마디와 손가락, 손바닥이 다 너무 아팠다. 

모든 튀김을 자유자재로 혼자 만들게 되었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자칫 잘못하면 화상을 입곤 하게 되는 뜨거운 열이 나는 곳 아래에 튀김들을 예쁘게 놓아두곤, 타이머를 맞춘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모든 튀김은 버리고, 새로운 튀김을 계속 채워둬야 한다. 

인기가 많은 튀김은 튀겨도, 튀겨도 계속 사라지기에 한 여름에 에어컨 하나 없는 뜨거운 주방에서 100도가 훨씬 넘는 기름과 사투를 벌이며 일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누들" 포지션은 팔이 빠질 듯 아팠던 것을 제외하고는 꽤 재미있었다. 

인스턴트 누들처럼 네모 반듯하게 얼려있는 소바와 우동 누들을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손잡이가 달린 조리 기구에 넣고 뜨거운 물에 넣는다. 젓가락을 넣어 휘휘 돌리며 시간을 맞춰 꺼내 물기를 탁탁 털어준 뒤 그릇에 담고 손님이 원하는 소스나 토핑을 얹어준다. 

처음엔 타이머가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나 누들이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저을 때의 느낌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누들이 담긴 손잡이를 탁탁 터는 행동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팔도 굉장히 아프고, 어깨도 아프지만 나에겐 음료를 만들 때와 비슷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동이나 소바 위에 카레, 멘타이코, 비프 등 다양한 토핑이나 소스를 올리는 것이 마치 음료를 만들고 휘핑크림을 예쁘게 담아주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나 보다. 





몇 개월에 걸쳐 다양한 포지션을 다 배우고 나면 어느 새인가 가게의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제야 매장의 주문, 마감, 오픈 업무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매장에서 주문 업무는 꽤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이다. 어느 레스토랑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주문을 너무 많이 해서 음식이 남는 것도 문제이겠거니와, 재료가 모자라 팔지 못하게 되는 것도 문제이다. 

매장의 매달, 그리고 작년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재료가 필요할지를 계산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주문을 하여야 한다. 작년과 다르게 갑자기 인기 있는 메뉴가 있을 수도 있고, 작년에는 인기가 많았지만 올해는 잘 팔리지 않는 메뉴도 있다. 그 부분에 대한 계산을 해서 최대한 필요한 만큼 주문을 해야 하는 것이 매니저의 업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주문을 하고 나면 그 물건이 도착하는 날, 주문지와 실제 주문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실제로 배달 온 것이 내가 주문한 것과 빠짐없이 같은지를 확인해야 한다.



오픈 업무도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다른 직원들보다 빨리 출근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는데, 내 가슴까지 오는 커다란 솥에 물과 재료들을 넣고 국물의 베이스가 되는 육수를 끓이는 일이었다.

가스 밸브를 열어두고, 나오는 가스에 토치를 이용해 불을 붙이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은 가스가 새어 나오는 바람에 펑하며 불이 붙어 속눈썹이 타는 위험한 일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빈 매장에서 혼자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크게 다치지 않음에 감사하며 눈을 부여잡고 멍하니 있었다.

또 너무너무 무겁고 큰 솥을 자주 들다 보면 허리가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누구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일. 매번 혼자 하다가 허리 디스크라는 병도 얻게 되었다. 



부 매니저로 일하며 가장 많이 힘들었지만, 또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업무는 직원 관리 업무였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험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뭘 시키기보다는 내가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 성격인 것도 문제였다.

그곳의 터줏대감인 한 직원도 문제 중 하나였는데 그녀는 현재 매니저가 오기도 전, 가게가 오픈할 때부터 일해온 직원으로 이 가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던 직원이었다. 요리코라는 이름의 그녀는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시드니에 온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 영주권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우리 가게에서 영주권을 위한 스폰서 제안을 받지는 못했는데, 본인보다 경력도 짧은 내가 부 매니저로 이 레스토랑에 발령받은 것이 매우 언짢은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텃세를 부리긴 했지만, 내가 모든 포지션을 배우고 정식으로 부 매니저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자 그 텃세는 더 심해졌다. 대놓고 내가 하는 것에 반대를 하거나, 항상 있던 미팅 시간에 참여하지 않고 딴짓을 하거나 내가 지시한 일을 하고 있는 직원에게 가서 다른 일을 시키는 것 등 누가 봐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 행동을 하였다.

고민이 쌓여갔지만, 어디에 털어놓기도 힘들었다. 누구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내가 맡은 직책이 부담스럽고 무거웠다.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두려웠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유스케상이 찾아왔다.

그는 이 곳의 직원은 물론 돌아가는 상황도 다 알고 있는 분이었다. 나에게 커피 한잔을 제안한 그는 "요리코 때문에 많이 힘들지?"라고 먼저 물어왔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할 수없던 일을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즈음 그가 설명했다.

"요리코는 원래 자존심도 세고, 성격도 센 스타일이야. 아마 본인보다 늦게 들어온 엘린이 맘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해. 하지만, 엘린이 일을 잘 해낸다면 그녀도 분명 인정하게 될 거야. 요리코에게 조금만 시간을 줘. "

또한 그는 덧붙였다.

"좋은 리더란 뭐라고 생각해? 좋은 리더란, 직원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찾아내어 그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해. 다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는 직원들을 한데 모아 팀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리더야. 네가 할 일은 직원들이 어떤 것을 잘하는지 찾고, 그것에 맞는 포지션에 넣어 매장이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되게 하는 것. 그리고 좋은 팀워크를 만드는 것이야."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길을 잃었다가 표지판을 찾아낸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만 같았다. 나에게 이런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감사했고,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내가 이 곳에 속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약 2년의 기간 동안 나는 이 곳에서 일했다. 

미뤄지고 미뤄지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회사의 변호사 분과 함께 스폰서십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던 즈음, 시드니 정부에서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스폰서십 비자를 받는 것이 한층 어려워졌다. 이미 받은 사람 중에서도 서류 재 검토로 거절이 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요리 학교를 다니거나 요리 경력이 많지 않던 나는 비자를 받기 쉽지 않아 보였다. 회사 내에 여러 가지 수를 써서 비자를 받아왔던 다른 경우가 있지만 이번에는 더욱 까다로운 심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요리가 아예 막힌다는 얘기나, 주변에서 불안한 뉴스들이 들려올수록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두려웠고 모든 것을 망칠까 봐도 두려웠다. 생각과 생각을 거듭한 후에 나는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스폰서 비자를 신청해볼 수는 있었다. 회사의 변호사 분께서도 시도를 해보라고는 했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스폰서 비자를 받아도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다. 요리로 비자가 아예 막힌다는 얘기도 들려왔고, 불투명한 미래를 믿고 앞으로 4년을 더 이곳에서 일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드니라는 곳이 좋아서 3년을 보냈고, 그중에 2년을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단지 비자를 위해 레스토랑에서 보낸 2년의 시간도 무척이나 길었지만 앞으로 4년간 더 일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너무 좋아하던 시드니를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고민과 고민을 거듭해봤지만, 지금으로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너무 바보같고 한심해서 눈물만 났다. 너무 살고 싶던 곳에서 살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했고 억울했으며, 다시 이 곳에서 살 수 없게 될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너무 괴로운 마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정리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 내내 집에서 우울감에 시달렸다. 숨 가쁘게 달려온 그간의 시간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마냥 허탈감이 밀려왔고, 내가 실패자가 된 것만 같았다.

도전해 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과, 나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지? 하는 억울한 감정들이 섞여 나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즈음 레스토랑 전에 일했던 카페의 매니저였던 미사토 상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카페가 오픈할 때부터, 오픈 멤버로 매니저를 해왔고, 몇 년간의 매니저 끝에 스폰서 비자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녀는 스폰서 비자가 끝나는 즈음 영주권을 신청할 계획이었었는데, 그녀가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사장이 그 카페를 중국인에게 팔면서 그녀의 스폰서십도 무효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장은 약 4년을 넘게 일한 그녀에게 말도 없이 중국인에게 가게를 팔았고, 그 가게를 넘겨받은 중국인은 그녀에게 스폰서십 비자를 연장해 줄 생각이 없다고 했단다. 

그 덕에 그녀는 10년 가까이 지내던 시드니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나에게도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내가 했던 결정이 마냥 바보 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만약 내가 비자를 진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랬다면 만약 나는 지금 시드니에 살 수 있었을까? 아님 나도 몇 년간 고생한 후 미사토상처럼 되었을까?




시드니에서 돌아온 후 마치 향수병처럼, 시드니와 관련된 사진만 봐도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는 법,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새로운 미래를 계획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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