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팬데믹 세미나를 마치며
아무래도 집세가 제일 부담이었다. 학교가 런던에서도 제일 비싼 땅에 자리잡고 있어 걸어 다닐만한 거리의 집은 언감생심이었다. 통학이 기차로 한시간쯤 걸리는 근교에 하우스 셰어로 방을 한 칸 구했다. 방만 우리 공간이고 화장실과 주방은 그 집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쓰는, 런던에서는 일반적인 주거 형태였다.
아낀다고 아꼈는데도 1년짜리 석사 과정을 마치니 진짜 생활비가 동나버렸다. 1년치 학비만 남은 상황에 박사를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지 하고 일단 고- 했다. 분할납입제도를 이용해 등록금 3분의 1만 먼저 내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면서 모자란 학비를 어떻게든 채워보기로 했다. 돌아보면 참 무모했지만 그땐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사를 시작하면서 약간 더 외곽에 집을 빌려, 같은 학교에서 석, 박사를 하던 선후배 두명과 함께 살았다. 집세는 그 둘이 나눠내고 우린 밥을 해주면서 관리비와 생활비를 전담했다. 우리로선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옵션이었지만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 그 선후배가 떠난 후에도 이래저래 연결된 사람들과 그 집에서 4년을 더 지냈다.
그 집에 몇개월간 지내고 간 사람도 있고 여행 왔다 며칠 자고 간 사람도 많았다. 집을 나오면서 하루라도 잔 사람이 몇명인지 세어보니 대략 4~50명은 되는 것 같았다.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정말 힘든 게 한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면 며칠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이다.
갑자기 그때가 떠오른 이유는 지난 수요일 있었던 글로벌 팬데믹 세미나 때문이다. 연사 중 한분이었던 김택수 선생님과 이야기하다가, 그분이 우리 집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같이 살았던 후배와 친한 사이여서 런던에 놀러 왔다가 하루 신세를 지셨다는 것이다. 잠깐 왔다 가셔서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진 않지만 참 신기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분뿐 아니라 이번 팬데믹 대응 세미나 섭외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셨던 HPRC의 이훈상 선생님도 역시 우리집에서 하루 잔 적이 있다. 당시엔 가나에서 근무 중이셨는데 런던에 볼일이 있어 가족과 함께 오셨다가 다른 친구의 소개로 우리 집에서 하루 머물고 가셨다. 이분을 소개해 준 친구가, 우리집에서 한 달가량 같이 살았던 상준이다. 역시 이번 세미나에 기획으로 참여했고, 애초에 HPRC와 같이 활동한 것도 이 친구 때문에 연결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세미나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중 세명이나 런던의 그 집을 거쳐간 이력이 있는 것이다. 당시 내 전공은 보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집을 거쳐가시는 그분들과 나중에 같이 일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이번 세미나는 업무 상으로도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난 연말부터 백신 관련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글로벌 불균형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었다. 세미나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일을, 런던에서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장학금도 없이 정기적인 후원도 없이 학위 과정을 하느라 아내와 함께 고생고생을 했는데, 결국 기적적인 방법으로 재정이 채워지며 박사를 마쳤을 뿐 아니라, 당시 재정이 모자랐기 때문에 닿을 수 있었던 인연들이 지금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하는 소중한 동지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항상 영국에서, 남아공에서 고생하던 때가 돌아보면 내 인생에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 생각했다. 지난 세미나 같은 이벤트들이 생길 때면, 그 생각이 더더욱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