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May 03. 2021

그릇 이야기

해수부 장관 후보자 논란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


해수부 장관 후보자가 영국서 그릇을 잔뜩 사왔다는 뉴스를 보고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교민들 사이에서 영국산 접시나 찻잔을 모으는 건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나 고가로 팔리지 런던 외곽에 있는 공장 직영점이나 창고식 매장에선 꽤 저렴하게 구할 수 있고, 카부츠 세일이라 불리는 벼룩시장이나 이베이 등에서 중고거래도 흔했다. 고학하던 우리도 선물용으로 몇 세트 샀을 정도로 부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릇 이야기는 교민 모임에서 단골 소재였다. 요새 어느 브랜드가 유행이니, 지금 어디에서 세일을 하니, 가성비는 어디가 좋고 어디가 제일 고급이니 등등 나와 아내는 크게 관심 없는데도 듣다 보면 저절로 영국의 접시 핫스팟 지도가 그려졌었다. 


교민들이 그릇에 몰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워낙 집에 초대하는 문화가 흔하기 때문이다. 영국 음식이 원래 특별할 게 없고, 좀 괜찮다 싶은 레스토랑은 너무 비싸서 교민이나 유학생들은 주로 집에서 모였다. 어느 그릇에 음식을 내고 어느 찻잔에 티를 내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내놓는 그릇의 수준은 집에 오는 손님을 환대하는 정도를 재는 척도이기도 했다. 가족용, 흔한 손님용, 귀한 손님용 세트를 구비해 놓고 용도에 따라 쓰시는 분도 많았다. 


우리도 유학생치곤 집에 손님을 많이 부른 편이긴 한데, 그릇에 의미부여하는 영국 교민 분들을 초대할 땐 조금 멋쩍었다. 한번은 어떤 분께서 나에게 "호스트가 자기 소득, 재산, 직업, 나이에 따라 '급에 맞는' 접시 세트를 구비하는 게 손님에 대한 예의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다만 장 선생은 학생이라 수준에 맞게 하면 된다"라며 면책권을 준 적도 있다. 웃어넘길 만한 일이지만 손님용으로라도 괜찮은 그릇을 몇개 사놔야 하나 잠시 고민은 됐다.


하지만 그 정도 급을 갖춰 대접할 여유는 우리에게 (당연히) 없었다. 당시 등록금도 겨우겨우 냈고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받은 게 많아서 초대도 많이 했지만, 음식을 더 풍성히 준비하는 성의는 몰라도 그릇까지 갖추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가격도 가격인데다 그릇 수집하러 다닐 시간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 집에 있는 그릇이며 접시는 대부분 여기저기서 얻은 것들이었다. 마침 우리가 이사하는 타이밍에 귀국하는 집에서 준 세트 하나, 같이 살다가 나가는 사람이 남긴 세트 하나, 선물로 받은 세트 하나, 어디 나갔다가 싼 가격에 업어온 (약간 하자 있는) 세트 하나... 우리 집에 손님이 좀 많이 온다 치면 제각각 다른 그릇과 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그게 부끄러웠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오른 유학길에 학비며 집세며 생활비며 이런저런 통로로 채워지는 게 너무나 신기했고, 제각각 사연의 서로 다른 접시는 마치 그 채워짐의 물증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앞접시 하나에 떠오르는 반가운 얼굴들, 샐러드볼 하나에 떠오르는 뭉클한 사연들, 찻잔 하나에 떠오르는 소중한 추억들은 나와 아내의 삶에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유학 후 귀국길에 포트메리온이니, 웨지우드니, 로얄달튼이니 하는 고급 접시들을 짝으로 갖고 오진 못했지만, 은혜와 감사와 관계가 얽혀있는 수많은 그릇들이 우리에게 있었고, 유학시절 만난 소중한 인연의 증표인 몇몇 그릇들은 지금도 감사히 쓰고 있다. 사람마다 의미부여하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나에겐 이 그릇들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