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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Apr 19. 2021

처음이 어렵다

원수산 모험 놀이터



세종의 자랑이라는 원수산 모험 놀이터. 산 밑에 차를 대고 가파른 등산로를 15분쯤 따라가면 나무숲에 둘러싸인 작은 놀이터가 나온다.

10미터 가까이 돼 보이는 높은 미끄럼틀은 올라가는 길도 꽤나 경사가 급하다. 예닐곱 살 형 누나들도 겨우겨우 올라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도준이가 가기엔 난이도가 좀 높을 것 같다.

하지만 다섯살 허세가 가득한 우리 도준이, 자기한텐 하나도 안 어렵며 호기롭게 미끄럼틀에 오른다. 구름사다리 부분까진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올라갔는데 암벽 등반 코스는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하나도 안 어려워"에서 "어려워"로 급 태세를 전환하더니 밑에서 대기 중인 아빠에게 내려가겠다고 안긴다. 아빠가 따라 올라가기엔 입구가 좁아서 혼자 못 타면 방법이 없다.

1년은 더 있다 와야겠다 싶어서, 싸온 간식이나 먹고 가자고 자리를 잡았다. 나름 자연 속에서 쉬다만 와도 꽤 괜찮은 나들이라 생각할 참이었다.

과일 몇 개 집어먹고 또 용기가 났는지, 도준이가 한번 더 미끄럼틀을 타보겠다며 아빠 손을 잡아끈다. 아까 포기했던 구간에서 살짝 도와주니 이번엔 제법 많이 올라간다. 하지만 꼭대기까지 곳곳에 난관이 있다. 가파른 정글짐 구간과 성기게 엮여 도준이의 작은 발이 숭숭 빠지는 흔들다리가 최대 고비다. 밑에서 보니 아이 다리가 달달 떨리는 게 영 불안하다. 울먹울먹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그래도 기특하다.

기를 쓰고 올라오는 동생이 안 쓰러웠는지 정상 앞 마지막 고비에서 한 형아가 도준이 손을 잡아끌어준다. 긴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선, 형이 도와줘서 잘 탔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끝까지 올라간 도준이에겐 칭찬을, 뒤따라 내려온 형아에겐 감사를 아끼지 않고 표현해줬다.

그다음부턴 훨씬 수월하다.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는 도준이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리지만, 그래도 한번 해봤다고 진도를 더 빨리 뽑는다. 제법 여유가 생겼는지 밑에를 내려다보며 "아빠 사랑해요"도 외쳐주고, 같이 올라온 친구한테 몇살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렇게 사귄 동갑내기와 한참을 더 타다가 어둑해져서야 집에 돌아왔다.

아이가 하나씩 고비를 넘기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다. 처음 웃을 때, 뒤집을 때, 일어설 때, 걸을 때, 말할 때... 이제 좀 컸다고 '처음' 딱지를 붙일만한 성취를 보여주는 일은 훨씬 드물어졌지만, 오늘 같이 장벽 하나를 뛰어넘고 새로운 모험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땐 기분이 남다르다. 앞으로 아이에게 얼마나 큰 난관이 닥칠지, 얼마나 험한 인생이 펼쳐질지 걱정이 되다가도, 포기 없는 시도와 선배들의 도움과 동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갈 것이란 기대에 마음을 놓는다.

그러고 보면 날마다 새로운 도전이 꼭 다섯살 도준이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남아공에서 락다운을 뚫고 힘든 귀국길에 오른 지 이제 1년이 조금 못 되었는데, 그새 정말 예상치 못했던, 그리고 나에겐 버거운 일들이 많았다. 입사 직후부터 수많은 프로젝트에 딸려 들어갔고, '전문가'랍시고 연구원의 잡다한 행사에 불려 가는 경우도 생겼다. 대외활동도 늘어서 공론장에 이름이 거론될 때도 있다. 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국책연구원 소속 박사라는 이유로 이렇게 능력 이상의 일을 맡아도 되는지 늘 자문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의 후들거림을 이겨내고 한고비씩 넘기다 보면, 새로운 성취를 이뤄냄에 더하여 한 단계 더 성장한 내 모습을 보게 될 거란 믿음이 생긴다. 처음이 어렵지 자꾸 하다 보면 또 익숙해지고 더 능숙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어차피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지금까지 그랬듯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이 있을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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