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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l 20. 2021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연대의 힘을 믿으며

솔직히 말하면, 팬데믹이 막 시작할 때 나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코로나19의 위험이나 그 파급효과를 과소평가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건 위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과학과 이성에 근거하여 쉽게 행동을 바꿀 줄 알았다. 초반 혼란을 딛고 균형잡힌 대응으로 금세 옮아갈 줄 알았다.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 돌아볼 줄 알았다. 적어도 '전대미문'의 재난 앞에선 함께 힘을 합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전부터 존재하던 수많은 부조리와 불평등과 이기주의와 각자도생과 무능과 위선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힘을 내자고 이끌고 가는 사람이 있는 한편 냉소와 조롱을 날리며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보기 좋게 비웃는 사람이 있었다. 위기를 기회삼아 한 몫 잡아보려 공공의 이익에 역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나만 아니면 돼'라며 소수에 지워지는 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타심은 기껏 내 울타리 안 사람에게만 베풀어졌다.


...


방법을 몰라서 해결 못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에어컨 앞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회의할 수 사람에게 쪽방촌의 폭염은 남의 문제다. 4단계가 되어도 해고는커녕 월급 1원 줄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정규직 서비스업 종사자의 생계는 관심 밖이다. 부스터샷까지 맞을 백신이 있는 나라 국민들에겐 고위험군과 의료진에게조차 백신이 안 돌아가는 저소득국가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변이가 창궐하고 사람들의 생명과 생계가 위협받아도 '나만 아니면' 된다.


팬데믹이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렸을 뿐, 이 문제는 새삼스럽지 않다. 4단계가 없던 시절에도 가난을 못 이겨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휴교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백신과 치료제가 있는 질병에도 수십만의 사람이 죽어갔다. 불평등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고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는 신경 쓸 필요 없는 남의 일이었다. 전대미문의 재난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


어제 오랜만에 대전역을 다시 찾았다. 노숙인들에게 혹한보단 폭염이 더 견디기 쉬울까. 봉사자 중 확진자가 나와 일손이 모자라단 얘길 듣고 식사 지원에 나섰다. KF94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수시로 손을 소독하며 도시락과 방역 용품을 나눠주었다.


역사 안에 노숙인이 많진 않았다. 날이 따뜻해지면 공원이나 천변으로 흩어진다고 한다. 그나마 좀 시원한 대합실에 몇 분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평범한 승객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굳이 누가 안 알려줘도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묻어 있는 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시락이 남아 대전천 수변공원으로 내려갔다. 다리 밑마다 박스를 쳐놓고 자리잡은 노숙인들이 계시다. 주의 깊게 살펴야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저 우리가 안 보길 선택하는, 그런 존재들이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돌아오는 길 입맛이 쓰다. 이렇게 나와서 일부러 찾아야 보이는 사람들, 평소엔 외면하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변이가 유행하고 4단계가 되어도 내 삶엔 아주 약간의 불편이 늘 뿐이다. 그 사이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쉬운 말과 행동으로 내 마음만 위로하고 끝내는 게 괴롭다. 언제쯤 이 죄책감을 씻을 수 있을까.


...


여기까지 쓰고 더 할 말이 없어 어떻게 끝낼지 고민하는 와중에 봉사팀을 이끄는 친구에게 감사편지가 왔다.


"그 누구와도 내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넓은 역 광장에 살지만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는 것, 매일매일 경멸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독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노숙인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누군가와 내가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그 누군가가 아직 나를 붙잡아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의 사이의 멀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닌 서로 간의 장벽을 허물고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이러스를 이길 수 유일한 방도가 아닐는지요?"


그렇다. 그래도 우리에게 답은 연대밖에 없다. 한명이라도 더, 나의 울타리를 넘어서 괴로워하는 이웃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게 이 코로나19와, 지긋지긋한 바이러스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 땅의 부조리들과 싸우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이웃에게, 당신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든 계속 알려야 하지 않을까. 


예전보다 지금 난 더 비관적이지만, 바뀌는 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거면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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