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상당수 국가에서 백신 패스(그린패스, 코로나패스 etc.)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위스 등에서 백신 접종을 마치거나 코로나19 음성 확인서가 있어야 식당 등 다중이용시설 이용을 허용합니다. 유럽은 5~6월부터 원하는 모든 사람이 접종을 받을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접종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뿌리 깊은 접종 주저의 전통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는 한때 접종 의향 인구가 50%에도 못 미쳤습니다.
백신 패스의 효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접종에는 수많은 다른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정확한 평가는 추후로 남겨두고 아쉬운 대로 몇가지 사례만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프랑스입니다. 프랑스에선 백신 패스의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마크롱 대통령이 백신 패스 도입을 발표한 7월 12일 이후 1차 접종 인원이 급증합니다. 전체 접종률도 그 후 두 달여 동안 54%에서 76%까지 오릅니다. 7월에 유럽 중간쯤이던 순위는 9월 7위까지 오릅니다.
프랑스의 일일 접종 도스 (검은선: 전체, 푸른선: 1차 접종). 자료: 프랑스 보건부
포르투갈, 덴마크도 코로나 패스 도입 후 접종률을 끌어올린 케이스입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현재 접종률 88%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입니다. 덴마크 역시 77%로 접종률이 상당히 높으며, 현재 백신 패스 포함 모든 강제적 제한 조치를 해제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신 패스의 효과가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 것은 아닙니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등은 백신 패스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접종률은 60% 대로 저조합니다. 스페인이나 벨기에는 백신 패스 도입 없이도 상당히 높은 접종률을 달성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백신 패스가 항상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한가지 설명 가능한 변수는 유행 상황입니다. 유행상황이 심각해지면 백신의 유익이 커지기 때문에 접종률도 같이 오릅니다. 세번째 그림에 약 40개 국가를 대상으로 백신 접종률이 30%에 도달한 이후 3달간 누적 확진자 수와 접종률 상승분 간의 관계를 그려봤습니다. 예외가 있지만 역시나 확진자 수가 많은 곳에서 접종률이 더 빠르게 올랐습니다. 포르투갈,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등이 접종률도 많이 오르고 확진자 수도 많습니다(역인과관계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아이슬란드, 싱가포르 등은 유행상황이 안정적이면서 접종률이 가장 빠르게 오른 예외 지역입니다(한국이 가장 많이 올랐습니다). 이들을 빼면 접종률과 유행 규모 간의 관계는 더 뚜렷해집니다. 코로나 패스의 시행도 중요하지만 다른 외생변수의 영향도 같이 고려해야 합니다.
확진자 수와 접종률 향상 간의 관계
2. 우리나라 적용 가능성
앞서 봤듯 유럽의 몇몇 국가는 백신 패스의 효과로 접종률을 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항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주말마다 백신 패스를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습니다.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은 끝까지 설득이 어렵습니다. 그런 인구가 전체의 15~25% 정도 됩니다. 이들에게도 접종이 필요한데, 백신 패스로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아래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현재 접종률은 (1차 기준) 77%입니다. 접종이 가능한 성인 인구 중 90%가 이미 접종을 마쳤습니다. 백신 패스도 없고 유행 상황도 유럽에 비해 안정적이었는데 접종률이 이렇게 높습니다. 전통적으로 백신에 대한 수용성이 높기도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 한마음으로 참여해주신 시민들, 수고해주신 의료진, 담당 공무원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하지만 아직 접종을 망설이는 분들이 400만 명 넘게 계십니다. 이중 100만 명은 고위험군인 60세 이상 인구입니다. 11월부터 방역 단계가 완화되고 확진자가 늘어나면 미접종자 분들이 접종자보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이유로 접종 대상에 제외된 분들을 위해서라고, 접종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은 접종을 하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료: 질병관리청
현재 사용 가능한 옵션으로 유럽에서 사용된 백신 패스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발표가 안됐지만 다중시설이용 시 접종증명서나 검사 결과를 제출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방역 단계에서 미접종자도 인원제한 내에서 식당이나 카페에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만약 유럽과 같은 백신 패스가 도입된다면 미접종자에겐 방역 강화가 됩니다.
백신 패스는 다소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념에 의한 접종 거부자 비중이 높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접종을 안 받겠다고 답한 사람의 비중은 성인 인구의 3~5% 사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작용에 대해 우려하거나, 본인 건강상태에 자신이 없거나, 활동반경이 크지 않아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감염의 위험을 낮게 평가하는 등 각자의 사정이 있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이상반응에 대한 보상이 강화되거나, 주변에 접종의 유익을 느끼는 사람이 늘거나, 유행 상황이 변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접종 인센티브도 마음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나타납니다.
하지만 접종을 설득해야 할 최우선 순위인 고령층도 백신 패스에 동일하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관련 연구가 부족하지만 독일의 경우 활동반경을 늘리는 인센티브는 주로 젊은 층이 반응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아래 그림). 부작용이 두렵거나 건강에 자신이 없어 접종을 안 하는 노령층은 일반적으로 위험회피성향이 높아 활동반경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패스는 효과적인 고령층 접종 독려책이 될지 미지수입니다.
3.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 정말 정밀한 정책을 펴려면 그전에 관련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접종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접종을 꺼리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제가 과문해서인지 정책 시행에 앞서 그런 연구가 시행되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백신 패스를 도입하고도 80% 미만에서 정체 중인 해외의 예는 이미 80%에 육박한 우리에겐 패스를 도입할 적절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공급 물량이 충분해진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해외에서 썼던 긍정적인 인센티브를 충분히 써본 적이 없습니다. 기존에 가능하던 활동을 제약하는 디스인센티브보다는 접종자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주거나 금전적/비금전적 인센티브(바우처 등)를 더 적극적으로 제공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충분했는지도 불명확합니다. 예컨대 종교지도자나 연예인 등이 적극적으로 접종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은 최근까지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현재 보수층의 접종률이 다소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야당 의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접종을 독려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나 전문가 집단에서 더 효과적으로 소통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소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이상반응은 더 넓게, 가시적으로 보상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접종을 꺼리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여러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주면 도움이 됩니다. 백신 인센티브나 백신 패스 같은 제도를 도입할 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니는 미접종자'를 제재하는 수단이 아니라, 활동을 조금 더 안전하게 재개할 수 있는 보호장치로 홍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실제로 그렇습니다). 보건당국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나 마케팅 전문가를 섭외하면 활약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저것 다 했는데도 안 되면 미접종자에 대한 페널티 도입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유행상황이 심각해질 경우를 대비해서 더 높은 접종률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접종률이 상당히 높고, 아직 부작용이 적은 정책을 다 안 써봤으며, 더 강력한 조치를 도입할 만큼 유행상황이 악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재나 의무화는 옵션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집합금지 중인 고위험시설에 한하여는 지금 수준에서 미접종자에 대한 활동을 제한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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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팬데믹이 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정부가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이번 위기 뿐 아니라 다음 위기를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그 신뢰를 위해, 정부가 성급하게 정책을 도입하기보다 효과와 비용과 부작용을 종합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책의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은 저같은 연구자의 몫인데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긴 글을 남깁니다. 언제나처럼 의견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