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Oct 05. 2021

단체줄넘기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책이 아닌 연대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장기간 공존해야 하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지난 1월부터 단체 줄넘기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문 링크)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말입니다. '위드 코로나'시대는 모두 함께 발맞춰 뛰는 단체줄넘기와 같습니다. 이번 팬데믹은 공동의 대응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점프에 실패하면 모두가 패배하게 되는 단체줄넘기 같이, 방역수칙을 위반하는 소수에 의해 감염이 폭증하고 의료체계가 마비되는, 그래서 결국 일상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사가 쓰인 날짜가 지난해 9월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첫번째 감염자가 발생한 지난해 1월 이후, 우리는 모두 '코로나19 극복'이라는 단체줄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국제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비교적 선방했습니다. 최근 확진자가 꽤 늘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고, 팬데믹 이전 경제 수준으로의 회복도 주요국 중 가장 빠른 편입니다(아래 그림). 백신 접종도 시작은 늦었지만 현재 성인 인구 90%가 1차 접종을 마쳐 전 세계적으로 최상위권입니다. 여러 동료 시민 분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2021년 경제성장률 전망. 자료: OECD Economic Outlook (2021.9;   2021.5); IMF World Economic Outlook (2021.4)


하지만 실패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도권 4단계가 세달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접종자 중심으로 완화가 있었을 뿐 4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는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못 버티겠다고 광장에 나옵니다. 청년, 여성, 이주민, 비정규직 근로자, 장애인, 노숙인 등 곳곳의 취약계층은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에 비해' '평균적으로' 잘한 것은 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한가지 더, 우리가 감염을 통제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방역 수칙을 지키는 동안, 광화문에서, 이태원에서, 종교시설에서, 유흥업소에서 일탈하는 소수가 있었습니다. 접종 대상 성인의 90%가 접종을 마치는 동안에도 접종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 열심히 희생하며 참는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화가 날 만합니다. '누군 안 힘든 줄 알아?'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명시적, 암묵적으로 수칙 위반자들을 '위협 요소'로 낙인찍는 방식으로 감염을 통제해 왔습니다. "이 시국에 거길 왜 가", "집회 주동자는 살인자", "백신 미접종은 음주운전처럼 타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 등등, 팬데믹 기간 중 심심치 않게 들린 말들입니다. 소위 '사회적 압력'을 통해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이는 'K-방역'의 성공에 일정 부분 기여를 했을 걸로 봅니다(확진자 멍석말이라고들 하죠...). 


...


그런데 실패하는 개인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건강하고 재주 좋은 사람만 뽑아 나가는 단체줄넘기 시합과 달리, 우리는 다리가 아픈 사람, 체력이 약한 사람, 기술이 없는 사람,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 인내력이 높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코로나19와의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아주 오래 지속됩니다. 단체줄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있듯 팬데믹에 '이상적'이라 평가되는 삶의 형태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을 꼭 만나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꼭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위험시설이 생계의 터전이고,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숨통이 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태평해서 코로나19의 위험을 낮게 평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걱정이 많아 아주 작은 부작용의 가능성도 크게 평가합니다. 이들은 순전히 팬데믹 대응의 관점에서 보면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게 그들의 잘못인가요? 사회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들에게 자기의 삶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위기 대응에 실패하는 이유는 일탈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팬데믹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위기를 오래 살아남기에 적합하지 않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한 고리 때문에 대응에 실패했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고 배제할 수 없습니다. 대신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짐을 모두가 함께 나눠져야 합니다. 


.....


최근에 백신 패스 논의를 보며 백신 미접종자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점점 강해짐을 느낍니다. 저도 허위과장정보를 만들어내고 유포하는 무책임한 거짓말쟁이들에게는 분노합니다. 이들을 반박하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낸 적도 여러 번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통계에 의하면 신념에 의해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은 최대 5%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미접종자들은 그저 부작용이 걱정되거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거나, 본인의 활동범위가 안 커서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감염으로부터의 위험을 낮게 평가해서 접종의 이득이 크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존재 자체를 없는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제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그저 팬데믹 대응이라는 단체줄넘기에 적합하지 않은 특성을 가질 뿐입니다. 이들이 감염되거나 또는 이들로 인해 누군가 감염된다면, 그것은 그런 특성을 가진 이 재난이 가져온 지독한 불운이지 온전히 미접종자의 책임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질병을 고의로 전파하고 다니지 않는 한 이들을 "바이러스를 흩뿌리고 다니는 사람들"로 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이들을 (음주운전자처럼) 범죄자 취급하고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안심하고 접종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넓은 보상을 제공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이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휴가를 못 내거나 정보가 없어서 접종을 못하는 이들의 접근성을 올리도록 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이들의 접종은 팬데믹 대응을 위한 공동의 목표가 됩니다. 이들을 위해 쓰는 자원은 모두를 위한 정당한 투자가 됩니다.


...


'위드 코로나'의 핵심은 감염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개인이 감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정서가 형성되면 활동반경이 넓은 사람, 또는 접종을 못 받는 사람에 대한 인식도 달라집니다. 걸려도 이겨낼 수 있으면 질병의 책임을 원거리에 있는 타인에게 돌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정계층에게 지우던 짐을 모두 함께 지는 것도 더 수월해집니다. 


하지만 미접종자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힘을 얻을 때 위드 코로나는 여전히 살아남은 다수를 위한 각자도생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접종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사회가 더 열린 마음으로 반응해주고 공감해준다면 어떨까요? 그들에 대한 공감이 제도와 정책에 반영되도록 정부에 요구하면 어떨까요?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는 단체줄넘기,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을 옆에서 부축해 '끝까지' '함께' 생존하는 우리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인상 깊게 읽은 논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 재난 상황에서 기존의 법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개인의 부주의함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계층에게 특별히 가혹하게 경험되는 재난적 불운으로 인한 결과의 방치 및 특정 조건의 사람들에게 비대칭적으로 불리한 방역적 규제로 인해 강화되고 있는 사회의 불공정을 교정하는 것이다."

  - 손제연 (2021). 불운으로서의 감염: 팬데믹 상황에서 자율적 행위자의 권리와 책임. 법철학연구(링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