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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Oct 17. 2021

자유의 대가, 자유를 제한한 대가

공중보건을 위한 자유의 제한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공중보건을 위한 자유의 제한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올 4월 런던에서 열린 반봉쇄 시위. 출처: BBC

공중보건을 위한 자유의 제한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우리나라는 좀 덜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선 봉쇄 또는 백신 접종 의무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freedom"입니다. 사람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공중보건에 필요한 각종 조치에 반발합니다. 락다운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모임금지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마스크는 호흡의 자유를 제한하며 백신 접종 또는 백신 패스는 신체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저는 코로나가 사기라거나, 백신 접종이 코로나 감염보다 위험하다거나, 방역 조치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불필요한 개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팬데믹 시대에 이 시위자들이 외치는 '자유'의 가치가 상당히 간과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특히 개인주의 경향이 적게 관찰되는 아시아 국가에선 공동체를 위한 자유의 제한이 너무 쉽게,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 말미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출생과 교육과 노동과 오락, 성생활과 사상과 감정까지 완벽하게 통제되는 '문명사회'의 총통 무스타파 몬드와 그 사회에 우연히 방문한 '야만인' 존의 대화입니다. 불편한 감정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이 '안락한' 삶이라는 총통의 말에 존은 이렇게 답합니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존,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인간에겐 위험해지고 불편해질 권리까지 추구할 자유가 있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해도 사람들은 빽빽한 지하철에 몸을 싣습니다. 가족들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비말을 나누며 유흥을 즐깁니다. 질병이 갖는 위험의 크기를 각자 기준대로 평가한 후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할지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외부활동의 효용이 예상되는 위험의 크기가 크다면 얼마든지 출근을 하고 나들이를 갈 수 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강제로 이들을 집에 머물게 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기본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물론 이 자유가 어떤 상황에서나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은 명확합니다. 나의 행위가 상대방에게 해악을 미치지 않을 경우에만 그 행위를 할 자유를 인정받습니다. 감염이 창궐한 상황에서 마스크를 벗고 활보하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상대방을 감염의 위험에 놓이게 합니다. 이 역시 감염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집에 머물면 해결이 되지만, 구조적으로 잠재 감염자와의 접촉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감염자 절대수가 폭증할 경우 국가 의료시스템 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방역 수칙 위반을 해악이 발생하는 행위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도입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문제는 제한의 범위입니다. 감염자(확진자)가 감염 사실을 알고도 고의로 질병을 전파하고 다녔다면 그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가까운 일들을 하다가 전파된 감염은 누구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감염 사실을 모르고 지하철을 탔다가 같은 칸 승객에게 옮겼다면, 지하철을 탄 행위를 처벌해야 할까요? 집회를 주최했다가 참석자 중에 감염자가 나오고 그중 몇 명이 사망했다면 주최자는 '살인자'라고 불릴 정도의 중대한 범죄를 범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스크를 안 쓰고 거리를 걷는 사람은 현재 감염 확산에 몇 퍼센트 정도의 책임이 있을까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본인의 기본권을 포기하고 인내한다면 이것은 미덕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비난이 가능한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한 행동이 타인에게 미친 직접적인 해악을 측정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초기에는 마스크를 안 썼거나, 유흥업소에 방문했거나, 종교행사 또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코로나19에 확진됐다면 비난의 강도가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1년이 넘어가고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순 없기 때문입니다. 방역당국은 여전히 외출을 자제해달라지만 대부분은 '본인이 평가한 활동의 위험과 편익에 따라' 자기 행동을 결정합니다. 맛집마다 사람이 들어차 있고 경선 현장에 사람이 몰립니다. 이 행위들에 대해 국가도 더 이상 강한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개인도 서로 비난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불명확한 '해악'을 규정하여 당국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한 조치였다는 방증입니다.  




여전히 자유가 제한되는 곳이 있습니다. 4단계에서 고위험시설로 지정된 클럽, 유흥주점 등은 여전히 영업 자체를 못하고, 식당, 카페도 10시까지만 영업이 가능합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이 못 견디겠다고 거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위드 코로나' 전환에서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이 영업제한과 집합금지 기준입니다. 방역의 효과는 제한적인데 경제활동의 자유를 너무 오랫동안 침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영업금지 조치가 감염 확산 차단에 일정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해도,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때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뒤늦게 손실보상법이 통과되면서 7월부터 발생한 피해는 이제야 어느 정도 보상이 되지만(충분하진 않습니다), 그 이전에 발생한 손해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습니다. 일부만 지원금의 형식으로 지급됐을 뿐입니다(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후 신속하고 광범위한 지원을 단행한 다른 선진국과 비교됩니다. IMF가 최근 발표한 표를 보면, 우리나라가 팬데믹 기간 동안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추가로 지출한 재정은 10월 지급 예정인 손실보상금까지 합해도 GDP 대비 6.4%에 불과합니다. 이는 선진국 평균인 11.7%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아래 그림). 지급의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시기도 너무 늦었습니다. 


2020년 1월 ~ 2021년 9월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추가 재정지출. 출처: IMF


저는 국가가 손실보상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간과된 '자유'의 가치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초기부터 우리나라는 공동체를 위한 자유의 제한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공동체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잘 되는 것이라며 희생을 정당화했습니다. 집에 머물거나 영업을 쉬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받은 반면,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철없는 이상론자 또는 과학에 무지한 음모론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유의 제한이 당연한 의무라면 그에 따르는 보상이 주어질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한에 따르지 않을 때 처벌만 강화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자유의 제한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공중보건 위기에서도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국면이 지나가면 정부가 얻은 권한이 반드시 축소되어야 합니다. 자유의 제한이 당연하지 않다면 자유의 제한에 대한 대가도 더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습니다. 집합금지나 영업제한으로 발생한 손실을 국가재정으로 보전해주는 것은 시혜나 복지가 아니라 기본권 제한에 대한 정당한 보상입니다. 


팬데믹 같은 위기에도 '자유'와 같은 기본권은 결코 폄훼되지 않아야 합니다. 설령 자유의 대가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코로나19, 또는 코로나19 백신이 사기라는)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 믿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라는 기본권이 충분히 가치있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만 과잉 대응을 막을 수 있고, 필수 불가결한 제한조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위기 가운데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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