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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Oct 12. 2019

사랑 따위 못해도 괜찮다고?

연애고자의 착각 일대기


     어느 새벽 나는 설레지 않았던 남자애와의 대화를 마치고 섹스하기를 거절한 후 집에 돌아왔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몇 분 동안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당장에는 어색하고 지루하고 찝찝하고 뭔가 좀 아닌 것 같아도, 나 아무래도 좀 더 견디면서 얘랑 어떻게 될지를 두고 봤어야 했나? 차라리 내가 섹스 그 까짓 거 아무나랑 해도 되지 뭐, 하는 사람이었으면 이른바 사랑의 가능성이 내게 좀 더 열렸을까?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연애라는 건 다 어쩌다 시작하게 되는 것이며 감정이 특유해지는 건, 말하자면 사랑…에 가까워지는 건 그 나중 일일 수도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사랑이니 유대니 하는 감정까지 다다르기 위해선, 어설픈 마음으로나마 연애 관계를 시작한 후 지속시키는 것이 선제 조건이라는 거다. 근데 나에겐 늘 그 선제 조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어쩌지, 핵심부터 말하자면 난 정말 사랑이 하고 싶은데. 사랑이 궁금한 걸 넘어서 나는 사랑 없는 내 삶이 너무 걱정되고 불만스럽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고 뭘 몰랐던 이삼년 전, 나는 그 때도 연애를 하고 싶어하긴 했는데 그게 사랑을 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무한경쟁 사교육 정글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서일까, 어른이 된지 좀 지난 지금도 나는 남들이 뭘 할 때 내가 그걸 못하고 있으면 찌질하게 당황해버리고 만다.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스물 한 살 내가 어떻게 번듯한 연애에 진입할 수 있을까 열심히 통밥을 굴렸던 건 무엇보다 경쟁심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무의식 중에 내렸던 결론은, 외모 스탯을 상위로 찍어야 연애의 기회가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 나 정말 열심이었다. 얼굴이 좀 더 갸름해져야 하는지, 몸매가 아무래도 좀 딸리는지를 매일마다 고민하고, 술자리에선 살찔까봐 안주 말고 소주만 들이켰다. 내게 좀 더 어울릴 만한 머리 스타일과 눈썹형을 검색하는데 한 시간을 훌쩍 보내고, 한달에 한 번씩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들을 왕창 사서 반 이상 버려두고, 코 필러 할인 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성형외과 카카오 플친을 추가하고, 이것만 먹으면 살이 안 찐다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꼬박 먹고…. 

    뭔가 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꼬박 일년 이상이 걸렸다. 거울 속 나를 보면 아니 이만하면 꽤 예쁜데, 그럴 듯한 진지한 연애가 도통 시작이 되지 않았던 거다. 미팅, 소개팅, 연합 동아리, 홍대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하루는 들뜨고 취해서 연인 행세를 하다가, 며칠 뒤면 서로 귀찮아져서 연락을 않는 뭐 그런 일들의 반복. 형식적인 남녀 역할 놀이에 지치고 지쳤을 때쯤, 어느 날엔 아주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랐다. 아니, 애초에 내가 정말 연애를 하고 싶기는 한 건가? 생각해 보니 연애시장에서 경쟁력 있기 위해 그 난리를 치는 동안, 한번도 정작 내 마음이 궁금한 적 없었다.


    몇 번이고 나를 추궁해서 그래, 우리는 사귀는 사이라고 기어코 내게 확답을 받아낸 남자애가 한 명 있었다. 그 애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반나절 동안 내 카톡에 답장하지 않았다. 답장을 기다리면서 기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지옥 같던 그 몇 시간. 예전에는 매일 바로바로 답장하더니, 이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고 대충 구는 거야? 오늘 얘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거 다 아는데? 어제 내가 무슨 말실수 했나? 아님 처음부터 얘가 나를 그냥 가지고 논 건가? 그 반나절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비약적인 흐름이었고, 별 거 아닌 일에 불에 덴 듯 호들갑을 떠는 스스로가 나는 너무 한심했다. 그 애가 뒤늦게 보낸 답장에 마치 신경 쓰지 않은 사람처럼 답했던 건, 나 역시도 그 마음의 정체를 미처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우리는 며칠 동안 심심한 간격으로 메세지를 주고 받았고, 얼굴을 두어 번 보고 농담을 하고 웃었는데, 나는 걔랑 만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자꾸 이 짓을 계속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걔가 답장하지 않았던 그 반나절이 반복되면 어떡하나 두려웠고, 그 시간을 다시 겪게 되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 그를 카톡 목록에서 차단해버렸다. 이른바 연애라는 게 이렇게까지 나를 찌질하게 만드는 거라면, 그래서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러워진다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가끔 걔랑 연애를 지속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 결정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나는 누군가와의 쌍방향적 관계를 열망했기보다는, 내가 설정한 완벽한 자아가 충족되는 기분이 만족스러웠고 그냥 그뿐이었다. 한없이 자뻑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할 구석이 생기고,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을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거기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사고 예쁘다는 칭찬을 듣는 건 우쭐하고 좋았는데, “나 보러 온다고 내가 좋다고 한 바디미스트 뿌렸네?” 하는 말을 들었을 땐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표정이 굳어지는 거다. 좀 유치하지만, 내가 설정한 ‘완벽한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나 자체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받아야 했으니까. 뒤에서 그 호감을 사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서툴게 그 노력을 들키기까지 하는 내 모습은 쿨하지 않았으니까. (이건 좀 주제에서 벗어나는 얘기기는 하지만, 사실 남이 내 매력을 승인해주는 것을 통해 내 존재적 자신감을 찾고자 했을 때부터 내가 비굴해지지 않는 방법은 없다. 나는 처음부터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상정했던 거다. 그렇지만 이건 좀 더 나중에 도달했던 결론이고, 그 때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누군가와의 관계가 특유해진다는 건 반드시 내가 바라보기 싫은 어떤 모습을 '들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쿨하고 싶은데 찌질하게 행동하게 되고, 능숙하고 싶은데 서툰 행동만 하게 되고, 기다리고 싶지 않은데 기다리게 되고. 관계 속에 들어가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설정해놓은 보기 좋은 모습 안에 머무를 수 없다. 그리고 난 그게 외로워지는 것보다, '남친 없는' 대학교 2학년생이 되는 것보다도 더 두려웠다. 1년 여의 시간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어렵사리 나는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나 연애, 하고 싶지 않다고. 바라는 건 절대로 자존심이 구겨지지 않는 것, 그거 하나 뿐이고 연애는 오히려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당시 나는 내 미성숙을 직시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내게 연애가 시작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충분히 예쁘거나 매력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겐 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누군가와의 관계보다 중요해서였다는 것! 스물 두 살 나에게는 그것만큼 다행인 일도 없었다. 그 때 난 연애 시장에서 탈락한 루저가 되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고집쟁이가 되는 게 여러모로 가오가 안 죽는다고 여겼다. 다시 말해, ‘안 예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지만, 그에 비해 내가 누군가를 좀처럼 인생에 들여놓지 못한다는 건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그거야 뭐 내 마음 먹기 달린 일이지. 내 자존심 버릴 정도로 정말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그 사람과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야. 설령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도 나는 어디가 모자란 사람인 게 아니니까 괜찮아! 아, 그렇게 쉽게 낙관하고 나니까 기가 살았다.

    그런데 그 개운함은 오래 가지 못했고, 좀 나중에 나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게 왜 큰 문제가 아닌 게 아닌지. 그게 내 인생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연애 문제’가 다시 내 현안이 되어 돌아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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