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생 Nov 07. 2019

마음의 보약처럼 듣는 노래 1

"사랑"에 대한 글을 이제 쓸 수 있을 것 같아



1.    「좋아합니다」: 시절과 시절을 지나 신기하게 좋아하게 된 노래.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글까지 쓰게 되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왜냐면,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날 정도로 2년 전 나는 이 곡을 매 싫어했기 때문이다. 2017년에 발매된 직후 「좋아합니다」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제 데이식스는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그룹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무렵 내가 데이식스의 음악에게서 바랐던 건 "설익고 설레고 시린 젊음"(ㄷㄷ)의 감성이었기 때문이다. 스물 한 살, 막 대학생이 되어 청춘이니 첫사랑이니 하는 단어는 은연 중 계속 내 신경을 건드리고… 파란 새벽,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듣고 싶은 노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유독 그런 심상에 깊이 심취하게 되는 시절이었다. 예컨대 「Congratulations」 도입부 쿵, 빡! 심장을 패는 드럼 소리, 「Sing Me」의 ‘절대로’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애같은 호소, 「태양처럼」의 상큼하고 패기 있는 멜로디, 그 때 난 데이식스 노래의 그런 점들을 좋아했었던 거다. 그래서 2017년 들어 부쩍 멜로하고 단란해진 그들의 스타일이 나한테는 재미 없게 들리던 차, 「좋아합니다」를 듣고선 아 이제 완전 아니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제목부터 가사의 모든 단어가… 또 곡의 진행도… 그 나이 청년 가수가 담을 수 있는 것 이상을 해내려고 너무 잔머리를 굴린 것 같았고, 또 그러다 보니 결국 뻔한 말밖에는 전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살다 보면 맘대로 되는 날이 그리 많지는 않았죠…”로 시작하는 걸걸한 아저씨 가사는 뭐야, SG워너비야? 이런 노말은 인생 좀 살아본 중견 가수가 불러도 감동이 올까 말까 한데,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이러니 왜 아는 척인가 싶었다. 또 조용조용 노래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난 그대를…) 좋아합니다~~!” 하고 쩌렁쩌렁하게 후렴구가 시작될 땐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창피하기까지 했다. 아 뭔데 왜 갑자기 냅다 좋아한다고 소리를 지르시는 건데요…. 좋아합니다, 라는 너무 멀한 표현도 참을 수 없이 어색했고, 내가 기대하는 푸른 새벽 속 청춘이 할 법한 대사는 절대 아니었다. 취향이 아닌 걸 넘어서 우습고 작위적이게 들리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좋아합니다」에 대한 극렬한 불호를 마지막으로, 나는 한동안 데이식스의 노래를 찾지 않았다.

(근데 좀 어이없게 그 직후 2018년, 데이식스는 두 미니앨범에 걸쳐 <Youth> 시리즈를 발매했고 나중에 들어보니 그 앨범들엔 내 취향을 쏙 빼다박은 노래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니, 이름부터 Youth잖아. 「좋아합니다」만 아니었어도 내가 1년은 일찍 데이식스에 입덕했을지도 모르는 거다. 시절인연이란 정말 알 수 없다.)


    꽤 강렬하게 이 노래를 싫어했기 때문에, 우주의 신묘한 기운을 타고 어쩌다 보니 이 사람들에게 입덕하게 된 이후에도 「좋아합니다」는 내게 은연 중 금지곡이었다. 그러다 이 노래를 콘서트장에서 공연한 영상을 어쩌다 보니 보게 되었다. (오타쿠의 삶이란 ‘어쩌다 보니’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것과 같다.) 시간이 꽤 흘러 이 노래에 대한 첫 인상도 웬만큼 중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큰 저항감 없이 영상을 봤고, 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편곡이랑도 제법 잘 어울리고, 좋네! 데이식스의 모든 노래를 전곡 반복 재생하고 있을 때에도 굳이 빠져 있었던 「좋아합니다」는 그렇게 어영부영 내 플레이리스트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날따라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지쳐 있었다. 나는 데이식스의 노래 중에서도 「어쩌다 보니」 같이 명랑하고 락킹한 노래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날 유독 기분이 가라앉아서 통쾌해야 할 밴드 사운드가 소음처럼 성가시게만 들다. 비상이다, 비상. 연한 손가락질로 플레이리스트를 바쁘게 뒤적이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건, 「좋아합니다」라는 촌스러울만큼 직설적인 제목이었다. 음, 그냥 그런 단어에 갑자기 훅 끌릴 때도 있는 거다. 나는 침대에 바로 누워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가만히 이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루 종일 노래를 반복재생해서 들었다. 몸이 물리적으로 충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 덕에 해야할 일을 마친 건 아니었지만, 해야할 일을 마치지 않았는데도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는 있었다. 노래 하나가 내 하루를 구원했다. 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을 되살렸던 그날 이후, 「좋아합니다」는 내가 데이식스에 관해 길고 긴 글을 쓰게 된 첫번째 계기가 되었다.


    대체 왜 2년 전에는 그렇게나 싫었고 그 날에는 그렇게나 좋았던 걸까? 그건 아마 순전히 신뢰의 문제일 거다. 2년 전 나는 데이식스라는 밴드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인지, 누가 곡을 쓰는지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타인인 그들이 ‘좋아합니다’라고 무겁게 떨어지는 말을 노래했을 때,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았기에 그들이 어설프게 어떤 감성을 흉내내고 있다고 판단했다. 진심 없이 어떻게 보이고 싶다는 구상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듣기 싫고 가소로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들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에 데이식스의 각 멤버들은 내게 어떤 형태로든 유관한 사람들이 되었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알아보다가, 자연스럽게 강영현이라는 밴드 멤버가 그들 노래의 가사를 도맡아서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그가 대학 생활과 가수로서의 일을 병행할 정도로 욕심이 많으며, 자기 인생에 대한 기준이 높은 만큼 고민도 많이 한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강영현은 곡 작업을 하는 중 느꼈던 아쉬움과 부러움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데, 그 솔직한 욕심이 내게는 밉거나 부담스럽게 보이지 않다. 그건 그가 그런 마음이 질투와 열등감으로 고이기 전에, 부지런히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 만큼 생기 있는 사람이기도 해서다.


    그의 그런 모습들을 알게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는 "좋아하게" 되고 나니, 난 이제 그의 가사를 믿게 됐다. 그건 교주를 섬기 듯 영현 오빠가 다 맞아, 하는 맹목적인 마음은 아니다. 그냥 딱 한 사람이 미더워지는 만큼 그가 내게 가까워졌다. 꼭 내가 (그다지 많이 읽히지도 않는) 브런치 글을 쓰다가도 한번씩 멈춰서 이 단어 과연 솔직한지 오래 생각하곤 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가사를 쓰는 일은 단순히 기계적인 허세만은 아닐 거라고 이해하게 된 거다. 그 결과가 어땠든지 간에, 그가 지은 가사가 팽팽 굴린 잔머리보다는 진짜 마음을 그려내기 위한 고민의 소산일 거라는 믿음. 그래서 나는 “좋아합니다”라는 가사 앞에서 냉소하는 대신, 그가 적은 노랫말을 의심없이 듣는다. 그그가 전해주려는 기운에 기꺼이 전염될 수 있다. 그를 좋아하게 된 마음 덕분에 나는 그가 심은 마음을 온전히 전달받고, 어느 힘든 날에는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되는 거다.


    「좋아합니다」는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아니지만, 데이식스를 좋아하면서 생긴 나의 변화를 실감하고, 긍정할 수 있게 만든 최초의 곡이다. 나는 데이식스를, 또 「좋아합니다」를 좋아하게 된 내가 좋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물론 조금 시간이 걸렸다. 왜 하필 나는 “좋아함”이라는 마음이 대체로 아이돌 가수에게만 향하게 되는 걸까 비관도 여러 번 했다. 나와는 따로 있는 존재인 그들은 결국에는 내가 아는 모습 이상으로 존재했고, 그런 그들을 좋아하는 일엔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현실 아닌 망상에 마음을 주고 과몰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허무감이 들었달까.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속속들이 안다는 게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사실 우리가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 않나? 어차피 결국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내 자의적인 “캐해석”, 좀 심하게 말하자면 “망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마음이 부질 없다고 냉소하려는 게 아니다. 데이식스를 좋아하고 나서 비로소 느꼈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의미 있는 건 내가 한 사람을 완전히 파악하고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 거 같다. 다만, 좋아하는 마음을 통해 내가 계속 새롭고 낯설고 재밌게 살 게 된다면 그냥 그걸로 의미가 생기는 거다.


     데이식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게 그런 점에서 “망상” 같은 게 아니라, 충분히 현실적이고 의미 있다. 그들을 좋아해서 내 현실은 자꾸 바뀌고 있다. 원래 나는 한번 정한 생각을 잘 바꾸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방향으로 직관이 발달했다. 그래서 나는 어떨 땐 안전하게, 어떨 땐 똑똑하게, 어떨 땐 외롭게, 어떨 땐 비겁하게, 결론적으로는 주로 심심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데이식스를 좋아하는 나는 이십몇년 간 신체 일부처럼 장착했던 경계심을 잠시 내려놓는다. 바보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진심을 신뢰하고 그들이 주려고 하는 위로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어 행복해진다.


    그래서 나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좋아합니다」의 이 구절이 온전히 좋다는 거다. 좋아합니다, 참으려 해봤지만, 더는 안 되겠어요, 이제야 말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고 싶어요 그댈. 2년 전 내겐 참 촌스럽고 미덥지 않았던 이 가삿말은, “좋아하고 있는” 내게는 이제 데이식스에게 돌려주고 싶은 진심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나는 안녕한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