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
맛집에서 번호표를 받고 놀이공원에서 구비구비 줄을 서고 하는 일을 나는 싫어한다. 약속시간이 미뤄져서 사이에 갑작스럽게 한 시간이 생기는 일도 싫어한다. 나는 그간 기다림의 시간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공백을 견디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회피했다. 그런 내게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지금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배워보는 기다림의 자세를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몇가지 자문을 구했다 주변 사람에게. 기다린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약자가 되는 감각을 버틸 수가 없다고 너무 불안하다고 말하는 내게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지형은 늘 그렇듯 속편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멋진 말을 하기 전에 으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약자와 강자의 문제가 아니야 대인과 소인의 문제지. 아마 대인이란 기꺼이 약자가 되어야 할 때는 약자가 되는 사람이란다. 부러지지 않기 위해 꿋꿋이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날 흔드는 바람에 있는 그대로 흔들려 주기. 흔들려도 갈대가 갈대가 아닌 게 되는 게 아니니까 늘어났다 줄어들어도 고무줄이 고무줄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내 안의 복원력을 믿고 흔들리면서 기다리란다. 고개를 끄덕였다. 삶은 실험의 연속이니까 나는 이제 내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임계치를 실험해본다.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좋은 글감은 나올 거야 그게 위로라면 위로다.
소담 언니는 맨날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지 말라고 내게 화사한 스카프를 둘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기다림은 평생보다 더 길게 기다려야 한다고. 내가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글쎄) 내심 언니는 평소보다 내게 다정했다. 다정한 말투 치고 언니가 한 말은 내게 아득하기만 해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윤하에게 기대서 팔짱을 거니 걔는 내 손을 잡아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원래 모든 기다림은 ‘평생 이러고 있어도 되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아, 내 주위의 도사님들.
나는 집에 와서 아마 울 작정이었던 것 같은데 지원이는 남자 때문에 우는 미친년은 되지 말자, 고 빅스비 같이 명쾌하게 말해줬다. 음 나는 말을 잘 들으니까 집에 와서 수면제를 먹고 곧장 잤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역시 좀 막막했는데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담배를 피니까 좀 괜찮아졌다. 어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응석을 많이 부리면서 생각한 건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처음부터 걔를 기다리고 싶었던 거다 막막했을 뿐. 평생을 각오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까진 기다림을 이어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