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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May 28. 2020

사는 것만으로 좋은 인생

남산강학원 청년 강좌를 듣고

문쌤의 왕양명 강의를 들었다. 나누고 싶은 말이 몇자 생겨 복습 겸 적어보려고 한다.


왕양명은 양명학을 정립한 사람으로, 약 천 년 동안 중국 유교계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주자학에 정면으로 맞선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평생 성인이 되진 못했지만, 양명학은 현대에도 계속해서 스스로의 실효성을 입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나도 공부해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쨌거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 세계는 아예 다른 시공간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강의는 그런 의문에서 출발했다. 그를 대단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재능이었을까, 혹은 그의 조건과 운이었을까? (그러니 그만큼의 재능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이나 떡 벌리고 앉아있는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왕양명은 실로 많은 재능과 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왕화는 회시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다. 장원 급제했다는 인재는 세상에 너무 많아서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가 장원 급제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중국의 각 도시에서 지방 관리를 뽑기 위해 향시를 본다. 이 시험에는 각 시에서 상위 성적을 낸 30명만이 뽑힌다. 이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인재들 수백 수천명을 모아 중앙관직에 등용할 인재를 뽑기 위해 다시 회시를 본다. 왕양명의 아버지 왕화는 이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했다. 말하자면 중국에서 제일 ‘우수한 인재’로 뽑힌 것이다. (당시 중국은 ‘천하’임을 자칭하지 않았던가. 그들 말에 따르면 왕화는 천하제일의 인재다.)

왕양명은 그런 사람 밑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그 본인도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열 한 살 적 그는 조부를 따라서 놀러간 금산사에서 한시를 짓는다. 그냥 시도 아니라 각운을 맞춘 한시를 지어낸 것이다. 더구나 그는 다섯살 적부터 아버지가 읊은 경전과 할아버지가 지은 시를 줄줄 따라 외웠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골방에서 글만 깨작깨작 쓰는 범생이였냐고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양명의 평생의 지기 담감천은 청년 시기 양명이 심하게 빠져 있었던 것 다섯 가지를 든다. 그 중 하나가 임협, 즉 친구들 간의 의리였고 다른 하나가 기사, 말을 타며 활을 쏘는 일이었다.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서 맨날 패거리로 놀러다니고, 무예에도 출중한 능력을 보이는 청년 양명을 상상해본다. 어깨는 한껏 벌어져서 맨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미국 하이틴물 남자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만만하고 희망으로 가득찬 쾌남. 청년 양명이 내 주변에 있었다면 재수없다고 무진 싫어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큰 일’을 해내는 사람은 저런 사람이겠지, 수긍하고 질투했을 것이다. 능력과 조건을 모두 갖춘, 운 좋은 당신 같은 사람이 역사에 남는 거겠지요!

자신만만한 왕양명, 아마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이상은 한없이 높았고, 그는 자신이 아버지 이상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아버지는 천하제일의 인재여봤자 결국 누군가에게 쓰임을 당하는 신하일 뿐이었다. 그는 따라서 ‘성인’이 되겠다고 목표한다. 당시 성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주자학을 공부해야했다. 주자는 모두가 성인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아주 정치하고 세밀하게 성인이 되기까지 해야할 일을 경전으로 정리해놨다. 양명은 그 경전을 열심히 탐독했다. 주자의 경전에 따르면 사물에는 저마다의 이치가 있는데, 그들을 관찰하고 궁리해보면 마침내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앎에 이르고 나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

재수없게 긍정적이고 자기확신이 넘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양명 또한 주저없이 주자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다. 열아홉 살이 되자, 그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훈련을 하기 위해 대나무를 관찰해보기로 결심한다. 같이 한 친구는 관찰 3일만에 병이 나서 몸져누웠다. 양명은 그를 나무라며 자신은 반드시 대나무의 이치를 알아보겠다고 버텼다. 공부 잘하고 보는 눈 높은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대나무 옆에서 자고, 대나무에 관련한 서적을 파고, 대나무, 대나무, 대나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보고 궁리해봐도 도저히 대나무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관찰 7일만에 병이 나서 친구 옆에 몸져누웠다. 어이없지만 왕양명이 겪은 첫번째 좌절이다.

대나무 사건에 적잖이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양명은 조금 겸손해졌다. 그 전까지 그렇게 우습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세계, 회시에 급제해서 나라의 관리가 되는 일에 마음을 잡고 도전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한번에 붙을 줄 알았던 회시에서 그는 거듭 두번이나 낙제한다. 6년 간 세번의 시험 끝에서야 그는 마침내 회시에 급제한다. (장원 급제도 아니다, 얼레리꼴레리.) 콧대 높은 왕양명에게는 중앙 관리가 되는 일쯤이야 자신의 이상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일인데, 그조차도 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관리가 되어서는 아버지 못지 않게 출세하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곤장을 맞고 지방 말단 관리로 좌천이 되기까지 한다. 왕양명 자존심 살살 녹습니다. 얼마나 분했을까! 그의 재능, 그가 타고난 수많은 우수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고작 이런 취급이나 받다니.

그러나 왕양명이 양명학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이 무력화되는 환경 속에서! 그는 내려놓아야만 했다. 주자가 말하는 진리를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목표 의식을. 아버지 못지 않게 훌륭한 인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자신이 의지하고 믿었던 ‘자기’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게 된 순간 왕양명은 깨닫는다. 도달해야 할 지점 같은 것은 없다고. 진리를 깨친 성인이 되기 위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은 영원히 사람을 미완성의 상태에 내버려둘 뿐이다. 해서, 그는 말한다. 자신이 진리를 깨치고 싶다는 마음을 내는 순간, 그 출발 지점이 중요한 것이며, 아니,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성인은 어느 순간 도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마음을 내서 만들어진다. “하루만 지나면 어제 것은 낡아있다.” 때문에 ‘성인으로 살겠다’는 원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한 순간만 다짐해서 될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마음이 진심이라면 행동은 당연히 따라온다. 그러니 삶은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될 뿐이다.

왕양명이 그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고 의지하던 자신의 ‘가진 것’, 재능과 조건으로부터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순간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무엇을 목표할까, 무엇을 깨달을까, 어떤 능력을 계발해야할까, 하던 초조한 움직임은 없어졌다. 남은 것은 순간의 마음에 집중하며 당장 행동을 개시하는 것뿐이었다. 예컨대, 글을 쓰는 인생을 살고 싶으면 지금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고 다짐했을 때의 그 마음을 순간 순간 새롭게 먹으면서. 따로 이루어야 하는 목표는 없다.

우리 삶을 무겁고 흐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의 모자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재능이나 스펙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너무 믿기 때문에, 그들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힘이 든다. ‘되고 싶다’와 ‘하고 싶다’를 수없이 양산하며 도착 지점을 미래에 미뤄두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재능 탐구와 능력 계발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힘들기만 한 미완성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재능과 스펙을 추가하고 확보하려는 대신, 그들 모두를 무화시켜도 자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쓰는 것만으로도 좋은 글, 읽는 것만으로도 좋은 책, 사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생을 계속 만나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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