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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딛우 Aug 02. 2024

그냥, 여전히 원망뿐이라면

‘나’만 남아있던 관계의 끝

상처를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린 날 어리숙함을 비웃으며 뚫고 남아버린 상처는

끊임없이 원망해도 좋다.

그러나 결국엔 그 틈 사이로 자라난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방치하지 않을 용기는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 마음이 늙고 지쳐 병들기 전, 들여다보고 나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이 날 행복으로 이끌어 줄 거란 허황된 믿음은, 지나친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다.


제일 불행하다고, 힘들다고 악다구니를 써가는 동안에도 젊은 마음 일 때가 있었다면.


그 씨앗이 있음을 알아채고, 죽게 놔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원망뿐이라면, 자라지 못한 마음 위로 어떤 것도 바로 서 지 못한다.


비뚤게 자란 나르시시즘은 결국 나를, 주변을 메마르게 하고 홀로 되게 하며 결국은 모든 것을 해한다.





할머니는 십수 년 전 시집왔던 시절 그대로에서 멈춰있는 것 같았다.


움츠려있고 상처받은 자신이 여태 하염없이 가엽다고만 한다.

 

얼마든지 여유롭고 너그러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스스로를 가둬 위로하지 못한 병든 마음을 안고서 끙끙대며 그저 원망과 미움을 싣고 피해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니, 종국엔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는 피해자다.


주어지지 못한 사랑, 자신이 오롯이 원하는 행복을 타인에게서만 갈구하는 지나친 연민, 그에 따른 자기애는 마르고 말라 다 타버린 화분처럼 시들어갈 뿐이다.


할머니는 자기가 할아버지를 버리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버려진 건 자신이라는 걸 알까.


자신만이 가득해 가려진 눈이 뭘 모르게 하는 줄도 모르고.


버리는 것과 외면하는 것의 차이점을 굳이 둔다면 알고도 외면하는 것이 더 모진 것 아닌가.


끝내 오래된 부부 사이엔 세월에 쌓여간 질고 짙은 그들만의 애정이 아닌, 거래로 존재했던 것들만 남았고

그걸 자식들에게 들켰다면 창피해야 함이 마땅하다.

당당하게 피해자인 척 굴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또한, 지난날을 후회하지만 이미 늙어버린 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바로잡을 여력이 없다.


그저 하염없이 이젠 돌아오지 못할 제 집이 낯설다 우는 게 전부일만큼.



그게 벌이라면 감내하는 중일테다.


결국 십수 년을 함께 부대끼며 산다 한들, 남는 게 무엇인가.


서로에게 '나'만 남아있던 관계의 끝은 이렇게나 전부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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