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스트걸 Oct 16. 2020

외국 생활 중인 가족에게 권하는 그림책

한국 소녀 단비의 미국 유치원 전학기

코로나가 창궐하는 미네소타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파랗다 못해 눈이 시릴 만큼 높고 푸른 하늘, 수확의 기쁨으로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나 여전히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인 상황이다. 그나마 대형 체인 서점 반즈앤노블이 영업을 제기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문장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책 한 권의 엄청난 위로를 얻고자 종종 갈 곳 잃고 헤매는 날 한 번씩 서점에 들른다. 마스크를 중무장하고 돌아다닐지라도 잠시나마 내가 처한 상황과 시간을 잊게 하는 힘이 그곳에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의 서점은 'school' 관련 책들로 도베가 된다. 노트와 펜 같은 신학기 물품을 구경하는 맛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새로운 학급에 적응하는 방법을 조언하는 그림책들은 왠지 어린 시절 입학식 전날의 두근두근 설레던 마음이 떠올라 여전히 남일 같지가 않다. 아이를 키우며 신학기는 더욱 특별해진다. 어떤 부모인들 자식의 새 학기를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는 이 있을까? 새 학년에 잘 적응할지, 어떤 친구를 사귈지, 좋은 교사를 만날지, 혹여 또래 집단에서 외톨이가 되지는 않을지, 근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끓이질 않는다.



한국 소녀 단비의 미국 유치원 전학 풍경을 담은 그림책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 일러스트 작가 아나 킴Anna Kim의 첫 그림책 <Danbi Leads the school parade>.


한 손에 젓가락을, 다른 한 손에는 도시락 찬합을 든 이 명랑한 표정의 까만 양갈래 머리 '단비'를 서점에서 만났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주변으로 미국, 유럽 유명 그림책 작가들이 그린 익숙한 일러스트 캐릭터 사이에서 단비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세계적인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뉴욕에서 거주하는 한국 일러스트 작가 아나 킴의 첫 데뷔작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주인공 단비처럼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작가는 말도 통하지 않던 낯선 미국 학교 전학 날의 기억을 바탕으로 '단비' 이야기를 풀어낸다. 빨간 감나무, 기와지붕 아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장독대와 고무신, 그리고 이민 가방을 뒤로한 채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소녀 단비 가족의 모습과 함께 이야기는 시작된다.



Boom. Boom. 두근두근두근.

Everyone stared.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목했다.

But I didn't blink.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누구나 한 번쯤 동네를 이사하고 의도치 않게 전학을 갔던 기억들이 있지 않을까. 나를 제한 모두가 익숙한 공간 속에 덩그러니 놓였을 때 한 몸에 받게 되는 따갑고 낯선 시선을 기억한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전학 첫날부터 점심식사 시간 배고픈 배를 안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해야 했던 아홉 살의 내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그리고 토마스, 제임스, 마이클, 헨리... 낯선 이름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껏 “yes or no”만 답했을 다섯 살 우리집 꼬마대장이 떠올라 한참을 들여다봤던 책의 첫 장면.


"Let's have a parade!"


하지만 낯섦도 잠시. 식사 시간은 아이들을 하나로 만들기 시작한다. 작가는 문화의 다양성을 아이들이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키워드로 사용한다. 단비의 도시락 반찬인 만두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 아이들, 단비의 젓가락과 다른 아이들의 포크 & 스푼, 빨대 같은 커틀러리들이 협주 도구로 사용되며 모두가 함께하는 거대한 교실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이 하이라이트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억지나 위악 대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져 꽤 감동적이다. 순식간에 읽어낼 만큼 이 책이 주는 몰입감과 에너지가 대단하다.


단비는 서툰 언어와 다른 외모로 인해 많은 이들이 겪는 차별과 소외감 대신, 반 아이들을 리드하며 흥겨운 퍼레이드를 이어간다. 이 책을 구입해 별도의 매체 기사를 준비하며 작가님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작가님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직까지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제가 미국에서 자라면서 동양 아이가 주인공인 그림책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주체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강한 캐릭터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죠. '단비'를 통해 어린이들이 문화의 다양성, 서로 다른 것들을 교감하고 느껴가는 이야기를 계속 그려 나갈 생각이에요." 이 책이 나오기까지 첫 초고에서부터 6여 년여의 시간을 보낸 작가는 현재 뉴욕 작업실에서 후속 편 작업에 매진 중이다.


작년 겨울, 우리 집 5살 아이가 미국 어린이집에 전학 갔던 날이 떠오른다. 수십 명의 미국 아이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에 들어서질 못해 내 다리 뒤편에 숨죽이며 숨어있던 모습이 선하다. 차라리 단비처럼 모두의 주목을 받는 전학 첫날이라면 조금 나았을까. 영어 한 마디 못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쭈삣대던 소년에게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던 그날. 며칠 잘 적응하는가 싶으면 이내 한 번씩 친구들이 같이 안 논다고 했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속앳말을 하던 아이를 얼르고 달래며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보냈더랬다.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들에게, 문화의 다양성을 들려주고 싶은 부모들에게 이 단비 그림책은 여러모로 많은 위로를 건넨다. 어찌 낯선 외국에서의 느끼는 이방인의 감정이 아이들에게만 해당될까. 실은 어른들, 살며 한 번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냉대를 경험했을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림책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누구나 호수 한 곳쯤 마음에 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