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7 디옵터의 세상
한번씩 과거를 반추해보면 ‘정말 그 땐 왜 그랬을까?’ 후회가 밀려오는 일련의 사건이 있다. 그 선택의 주체가 온전히 나였음에도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나’는 차마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던 그 일. 만약 14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수술 하나가 그렇다.
—2009.01
초등학교 10살 때부터 안경을 써오던 내게 스무해 가까이 두터운 렌즈를 콧잔등에 이고 생활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마이너스 7디옵터의 고도근시인 이가 안경을 벗으면 온통 뿌옇고 흐린 사물들을 인식하며 익숙해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시절의 또래들이 그러하듯, 3번씩 압축해도 안경테 옆으로 삐져나오는 볼록한 렌즈두깨를 감내하고, 소프트렌즈와 하드렌즈를 번갈아 착용하며 뻑뻑해진 눈으로 인한 안통, 빨갛게 곧잘 충혈된 눈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학-직장-연애생활이 거의 모든 것인 20대 청춘에게는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라색, 라식도 안되던 얇고 연약한 각막을 소유한 고도근시자에게 한 줄기 빛이 비추었으니 그것은 ‘알티산 삽입술’이었다. 각막 위에 인체에 무해한 시력보정 렌즈를 삽입해 도수 1.0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구원과도 같았다. 때마침 타 잡지사로 이직을 앞두고 있던 나는, 서른을 맞던 1월, 겁없이도 렌즈삽입술을 감행했다. 수술 3주 뒤 이직한 잡지사의 마감 마지막 주에 출근을 시작했고, 그렇게 안경과 작별을 고했다.
—2023.06
그로부터 14년 뒤 여름. 다시 나는 어느 종합병원 안과병동 차디찬 수술대 위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FM 라디오에서 그토록 친애하던 조성진의 피아노 소나타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두 손을 심장 언저리에 가지런히 모으고는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주기도문을 되뇌었다. 눈에 감각이 사라지고 눈 앞에서 수술도구들이 움직이는 모든 광경을 마주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신체의 일부처럼 밀착되어있던 렌즈는 그렇게 채 십여 분 만에 양안 모두 허무하게 제거되었고, 나는 생의 두 번째 눈 수술로부터 일주일차를 맞았다.
— 만일 14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알티산 삽입렌즈를 긴급하게 제거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각막세포수를 말도 못하게 잡아먹고 있었던 것. 나의 각막은 그 전방을 도포한 알티산 렌즈로 인해 제대로 존속할 수 없었고 70대 노인의 눈과 다른 없는 상태로 14년 만에 다시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삽입술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수술 전부터 알고 있었다. 각막세포수의 감소 또한 주요 부작용으로 인지하고도 있었다. 그래서 1년 마다 한번씩 검진을 받았고, 눈의 건강을 살폈고, 언젠가는 발병할 백내장 시기 즈음 렌즈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 쯤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40대가 지녀야 할 각막세포수 2000개. 문제는 수술을 집도한 의사였다. 자그마치 4년 전 정기검진에서 각막세포가 1800대인 것을 버젓히 확인하고도 집도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이렇게 계속 떨어지면 렌즈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2000대 미만이었던 그 상황에서, 한번 줄어 든 각막세포는 다시는 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의의 무책임한 말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리고 4개월 뒤, 나는 다시 그 병원을 찾았다. 다른 한 쪽 눈은 1700대로 각막세포가 떨어진 상황. 그런데도 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번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 같으니 1년 뒤 내년에 추이를 봅시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명박한 데도, 이미 그 수위가 제거 권고 수치를 훨씬 밑도는 데도 의사는 다음번 진료를 기약했다. 미국으로 1년간 주재원 생활을 나가있어야 한다고, 불안감에 다시 물어도봤지만 그는 “내년”이라고 못을 박았다. 밀려드는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나는 그저 귀찮은 환자였던 것 같다.
각막세포가 1500대로 줄어들어 병원을 찾았을 때에도 의사는 바로 응급수술을 잡지 않았다. 여전히 다음번에 한국을 언제 나오냐며, 그때 다시 한번 더 보고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에게 윤리 따위란, 환자의 먼 미래의 눈의 건강까지 고려하고 미연에 방지해주는 의사로서의 윤리 따위란 없는 듯 보였다. 각막이식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찾아보고 와 불안에 떨며 울먹이는 내게 그는 진료실에 비치된 안구 조형물을 만지작거리며 “각막이식 요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 따위나 지껄였다. 제거 수술을 하며 인공 수정체를 미리 삽입하면 된다고도 했다. 개신교의 나라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기증된 각막을 찾는 일은 너무나 쉽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말들을 지껄였다. 성형을 하듯, 눈의 렌즈도, 수정체도 마음대로 넣고 빼고, 갈아 낄 수 있다고 믿는 그 오만한 생각에 치를 떨며 나왔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과연 당신 가족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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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의 제거술을 집도한 의사분은 내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단호한 한 마디. 딱 그 한 마디가 내 어리석음을 일깨웠다. “지금의 각막세포수로 어느 정도 당장은 잘 살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나중에 환자분 나이 들고 70-80세가 되어 각막기증을 매번 받으러 수술하고 앞이 안 보이는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한때 아름다움을 위해, 사회의 미적 기준에 맞춰 내 미래의 눈을 담보로 했던 내 자신의 성급함을 반성한다.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많은 글을 읽고, 쓰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끼리라 다짐한다.
3년 만에 브런치에 다시 글을 올리로,
8살 아이와 책을 함께 읽고, 느낌을 공유하고, 작문수업을일기 이 여름 시작하게 된 강력한 동기는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나 다 보는 세상이 어쩌면 먼 미래 내게 하락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꼈을 때, 인간은 온 사력을 다해 좋은 음식을 먹듯 글을 찾게 된다. 미리부터 절망하고 싶지는 않다. 글을 다시 써보려는 이유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