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 10월 첫눈 오던 날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온통 눈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흰 눈이 내릴 때마다 습관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이 떠오릅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 가운데 첫 문장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소설을 대학시절 처음 받아 들고는, 머릿속 가득 온통 흰 설원과 소음을 삼키는 고요로 한 동안 멍했던 기억이 있어요. 희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는 눈이 내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부랴부랴 창문에 기대어, 또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미동도 없이 창밖을 내다보게 될까요? 하늘에서 솜사탕처럼 흩날리는 눈발이 살포시 거리에 내려앉고, 켜켜이 쌓인 끝에 잔디며 아스팔트, 쓰레기 더미도 운동장도 온통 새하얗게 덮어버린 풍경이란. 햇볕이 그 위를 비출 때면 반짝반짝 빛나는 결정체에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기분을 느끼곤 해요. 희다는 건 언제나 감정을 정화하고 씻겨내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미네소타 시월의 첫눈
캐나다와 국경을 마주한 미국 북부 미네소타는 일 년에 절반 가량 눈이 내려요. 10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이 긴긴 겨울 동안 마치 설국의 첫 문장 같은 풍경들이 그려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합니다. 올해는 핼러윈이 시작되기도 전인 10월 18일 시월의 첫눈이 내렸는데, 9cm가 넘게 쌓인, 첫 눈치 고는 막강한 위력 앞에 온 세상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요 속에 잠긴 듯했어요.
미네소타 minnesota를 일컬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minnesnowta"라 부르고, 혹자는 "cold cold cold"라며 몸서리를 치기도 하죠.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낭만적인 눈은 때론 눈보라와 우박으로 변해 집과 가로수 등, 거리의 모든 것들을 사정없이 강타하기도 합니다.
미네소타의 첫겨울은 그래서 유난히 힘들었어요. 매일 같이 눈과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죠. 새벽 내내 집 주변의 눈을 치우는 스노모빌 소리에 잠을 설치거나, 빙판길에서 차를 몰다 미끄러지거나,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사이드미러에 뿌옇게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거나, 겨울에는 낮에 잠시 창문을 열어뒀다가는 금세 창틀 사이에 얼음이 생긴다거나, 베란다에 놓아둔 식물들을 집 안에 들이지 않으면 난데없는 폭설에 모두 시들고 만다는 것들 같은 것이겠죠.
첫겨울은 제대로 눈의 낭만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흘러가 버렸던 것 같아요. 사실은 한국과는 너무 다른 계절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겠죠.
코로나로 일 년 내내 심적으로 많이 지쳐있던 올해. 미네소타의 겨울을 준비하며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6개월 가까이 이어지는, 야외 활동도 좀체 쉽지 않은 긴 겨울 내내 집에 갇힌 생활을 또다시 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렇지만 그 긴 겨울에 한 번씩 눈이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삭막한 풍경일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창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특별함, 수북하게 쌓인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 위를 걸어보는 낭만, 벽난로 앞에 담요를 덮고 가족이 모여 앉는 특별함, 아이가 있다면 눈싸움과 올라프 눈사람을 만드는 소소한 액티비티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요.
겨울이 길다는 건, 그만큼 즐길 수 있는 겨울 스포츠가 많다는 것이기도 해요. 미네소타 아이들은 만 3세부터 아이스하키와 스케이트, 스키 레슨을 받을 만큼 추위와 설원, 빙판 위에서 강합니다. 부모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걸음마와 함께 하키를 배운다"는 말을 나눌 만큼, 아이들은 일찍이 눈보라와 매서운 바람을 맞고 자라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 여주인공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서도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 아이스하키를 즐겼던 그곳이 바로 미네소타랍니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걷다가는 "목에 전깃줄이 걸릴 만큼" 온통 눈으로 가득한 <설국>의 도시 에치고유자와의 전경처럼, 미네소타의 새하얀 겨울을 맞아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