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미국할로윈 새 풍경
미국의 가을은 할로윈으로 시작해 할로윈으로 끝난다. 볕이 무르익는 9월 중순부터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쏟아지는 탐스런 오렌지 빛깔 호박들이 그 시초다. 재래시장이나 식당가 사정도 마찬가지다. 검은 빛에 가까운 장식용 옥수수 decorative corns, 표면에 돌기가 잔뜩 돋은 '징그러운' 미니 호박들이 수북하게 쌓인 풍경이 넘쳐난다. 기괴한 호박을 골라 현관과 창문 어귀에 진열해 놓으면 할로윈을 맞을 기본 채비가 끝난다.
'할로윈의 본국'답게 10월 31일 밤을 성대하게 준비하는 이웃들을 이곳 미네소타에는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대낮에 차를 몰고 동네를 돌던 중 희뿌연한 형체가 나무 기둥 뒤에 숨어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한 적이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세히 살펴보니 집주인이 앞마당 나무 기둥에 온통 희뿌연 유령 인형들을 매달아 장식을 했던 거였다. 마치 은밀하게 숨어있듯, 대낮에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그 귀신 무리들은 10월 한 달 내내 동네 주민 여럿을 심신 미약 상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1년에 단 한번 유령과 인간들의 세상이 열린다는 이 '인간계 vs. 고스트계' 베틀에서 절대 지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지닌 주민들은 한 둘이 아니다. 아예 현관 앞에 별도의 묘비와 무덤을 '정성스레' 마련하는 가 하면, 성인 크기만 한 해골 피겨를 의자 위에 앉히기도 한다. 호박으로 만든 잭 오 랜턴 Jack O'Lantern이나 검정 고깔모자를 쓴 마녀 장식은 귀여운 축에 속할 정도다.
할로윈 데코레이션으로 악령들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면, 이제는 호박농장을 찾을 차례다. 펌프킨 패치 pumpkin patch라 부르는 미국의 호박농장은 할로윈 인기 방문지로, 주로 아이를 둔 가족들이 매해 일종의 성지처럼 방문하는 곳이다. 일 년간 할로윈이라는 엄청난 대목을 바라며 열심히 호박 덩굴들을 키워낸 농장은 이 기간 유례없는 장사진을 이룬다. 사전에 구입해야 하는 입장 티켓은 농장마다 다르지만 보통 1인당 14달러. 호박을 구입하는 데는 별도 금액이 발생하니 마냥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개장시간부터 몰려드는 차량으로 금세 장사진을 이룬다. 올해 상황은 더욱 특별했다. 장기화된 코로나 여파로 일 년 가까이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이들에게 펌프킨 패치 투어는 엄청난 이벤트이니 말이다. 게다가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운 야외 장소!
헤이 라이드라 불리는 대형 경운기, 볕집이 둘둘 말린 운치 있는 벤치에 올라타면 누렇게 말라버린 옥수수 밭을 지나 호박 패치에 닿는다. 발 끝에 차이는 모든 것이 호박, 호박, 또 호박이다. 어른 두 주먹 만한 크기부터 두 품에 안고 들 수조차 없을 만큼 거대한 자이언트 호박까지 다양하다. 밑이 펑퍼짐하고 둥글어 푸근한 호박부터 길고 얇은 새초롬한 호박까지, 하나도 같은 것이 없기에 세상 유일 나 만의 것을 고르는 재미가 있다. 한껏 할로윈 코스튬을 차려입은 가족들이 주로 이 호박밭에서 '인생 사진'을 건진다.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 같은 슈퍼 히어로에서부터 우주인, 복면 닌자 등 참으로 다양한 캐릭터로 분하는데, 역시나 대세는 '마녀'와 '엘사'다. 종종 드는 생각인데 <어벤저스>와 <프로즌> 이 나오기 전 아이들의 워너비는 누구였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펌프킨 패치가 단순히 호박을 고르고 사진 촬영만 하는 장소는 아니다. 14불이라는 고가(?)의 입장권에 대한 방문객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농장들은 저마다 부대시설과 연계 이벤트 구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어떤 펌프킨 패치가 좋아?" 같은 엄마들 사이의 품평과, 냉혹한 구글 리뷰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심을 벗어난 전원에서 즐길 만한 다양한 것들을 마련한다. 스코틀랜드 황소, 당나귀, 수탉과 꿩, 염소 떼와 양 같은 농장에서 사육 가능한 동물들을 공개해 작은 동물원을 만들고, 동시에 20명이 뛸 수 있는 트램펄린을 설치하거나 광물체집 체험장을 제공하는 식이다.
가을날 콘메이즈도 빼놓을 수 없다. <인터스텔라>의 도입부가 연상될 만큼 성인 키를 훌쩍 넘는 옥수수 줄기들이 성벽처럼 빽빽하게 늘어선 이 공포의 미로 속에서는 자칫 지도가 없다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실제로 입구에는 '이 미로에 들어선 순간의 모든 위험요소risk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어있을 정도다. 멀리서 보면 유령의 혼을 믿는 기괴한 서양문화를 우리들이 무작정 신봉한다는 비판적 시선에서 바라볼 수도 있으나, 가까이서 체험한 미국 할로윈 풍경은 호박 한 두 개 구입해 자신의 가집을 소소하게 단장하고, 호박과 계피, 꿀을 넣은 따뜻한 가을 음료에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아보는 '만추晩秋의 소확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코로나 시대의 할로윈 신풍경, Trunk or Treat
올해 CNN 등의 주요 미디어는 코로나가 만들어낸 대안적 할로윈 축제로 다름 아닌 'Trunk or Treat'을 꼽았다. 코스튬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할로윈 당일 저녁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 Trick or Treat(과자를 안 주면 장난칠 거예요)!"라며 사탕을 요구할 때 뱉는 전통적 관용구를 변형한 신조어다. 집 대신, 각자의 자동차를 할로윈 무드로 장식해 야외에서 사탕을 나눠 자는 취지다. 이번에 여러 마을 공터에서 진행된 진행된 드라이빙 스루 파티도 이 같은 대안의 연장선상이다.
다행히 아이 유치원에서 'Trunk or Treat' 행사를 열어 코로나 시대 이웃과의 왕래가 희박한 이방인 가족의 갈증을 해갈해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아래 10여 대의 차량이 늘어선 넓은 학교 주차장에서 학생들은 시간대별로 입장을 달리했다. 평소에는 사탕과 초콜릿, 젤리 한번 먹으려면 어른들로부터 '양치질 압박'을 받아야 했던 아이들이 이날만은 아예 큼지막한 사탕바구니 들고 원하는 만큼 실컷 담을 수 있으니 그 입장에서 할로윈은 당연 최고의 날이다. 게다가 원하는 캐릭터로 분해 상상놀이에 심취하는 데다 늦은 밤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온 동네를 탐험하니 "trict or treat"은 아이들에겐 마법의 언어다.
차량 장식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미국은 할로윈 데이 저녁이면 찰리 브라운의 만화 영화 <It's great pumpkin, Charlie Brown>를 방영하는 것이 전통인데, 그 만화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장식한 찰리 브라운 차량에 미국 엄마들 사이에선 '라떼는 말이야'가 새 나온다. 한 교사는 어린 시절부터 모았다는 '토이스토리' 장난감 컬렉션을 플렉스 하며 큰 호응을 받았다. 보라색 옷을 착장 한 '퍼플 위치 purple witch'(마녀도 그냥 마녀가 아니고 여자아이들마다 블랙 위치, 그린위치 다 다르다)와 '엘사'는 이제 빠지면 섭섭할 정도다. 아이 담임교사 에이미 Amy는 할로윈 날 깨어난 세 마녀가 공동 무지에서 무시무시한 각축전을 펼치는 영화 <호커스 포커스Hocus Pocus>로 꾸민 차량으로 로컬리티를 더했다. 하나하나 그 테마 안에 담긴 할로윈 이야기를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살피는 동안은 모처럼 모두가 코로나를 잊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다. 사실 신학기가 시작돼도 코로나 여파로 학부모들 만날 기회가 전무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마스크를 쓰고 공터에서 멀찍이 눈인사라도 나눌 수 있는 순간순간이 소중했달까.
10월 31일. 할로윈을 떠나보낸 다음날. 분명 아침에 눈을 떴는데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휴대폰 시간은 7시인데, 오븐에 세팅된 시간은 8시? 유럽에서는 summer time, 미국에서는 Daylight saving time이라 부르는 새 시간대가 적용된 탓이다. 이제는 오후 다섯 시가 되기도 전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는 때. 신나게 유령을 맞고 나자 밤의 길이가 한 뼘이나 더 깊어졌다. 신나게 가을을 떠나보냈으니 이제는 긴긴 겨울을 슬기롭게 견뎌내야 할 때다.
여행작가이자 프로해외생활러 토스트걸과 미국 랜선 여행을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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