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해외생활 10년차의 마트 탐방기
마트나 한번 가볼까?
나는 10년차 해외생활자다. 영국에서 6년, 미국에서 4년을 보내며 남들보다 조금 다양한 마트를 매일같이 출근도장 찍듯 드나든다. 한국에서야 다양한 업체의 새벽배송서비스가 바쁜 현대인의 장보는 시간을 줄여주지만, 이곳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갈비찜용 고기를 사기 위해 홀푸즈Whole Foods까지 내달려야 하고, 삼겹살 부위와 대량과일을 찾아 코스트코Costco 매대를 뒤지는 식이다. 김치라도 담글 참이면 배추와 무를 고르러 한인마트를, 가성비 좋은 냉동식품을 위해 트레이더스조Trader's Joe를 찾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어림잡아 10여 곳의 마트를, 음식의 목적에 따라 허들 넘듯 '찍고 떠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러려고 그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나 서글퍼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마트 주차장에서 차를 빼, 또 다른 마트 주차장으로 향하다보면 종종 현기증이 일기도 한다. 이러다 마트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 마트에서 매일 같이 장을 보는 일이 내 커리어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런 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누가 자격증이라도 주는 것일까.
해외생활은 마트에서 시작해 마트에서 끝이난다
마트에 대한 나의 생각은 펜데믹을 경험하며 완전히 뒤바꼈다. 피트니스 센터도, 대형쇼핑몰도, 서점도 모두 문을 닫는 봉쇄령의 절대공포 속에서도 마트는 'essential'이라는 늠름한 수사를 달고 굳건함을 과시했다. 지구상에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마트 만은 끝까지 존재할 것 같았다. 그래. 마트 너 만은 끝까지 문을 열어다오. 2년 여간 세상 모든 장소들이 문을 열고 닫는 와중에도 나의 마트는, 우리의 크고 작은 슈퍼마켓들은 변함없이 우리 생의 식료품과 생필품들을 늠름하게 팔아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마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마트에 가는 시간에 감사하기로 했다.
사실 누구나 낯선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찾는 장소는 마트 아닐까. 생수 한 병을 찾아, 다음날 간단한 조식거리를 위해 냉장칸을 두리번 거리면서 여행자는 그 지역 식자재와 로컬 브랜드와 만난다. 에어비앤비가 '현지인처럼 살아보기'의 꿈을 실현해 준 새로운 개념의 숙박업이었다면, 그것이 완벽해질 수 있던 데에는 아마도 현지인처럼 여행지에서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할 수 있게끔 하는 '장보기'가 가능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10년간 무수히 드나들었던 세상의 슈퍼마켓들, 그 장소와 사람, 물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기록해보기로 한다. 지구상 어디선가, 지금도 마트에서 장보는 일이 여전히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의 일상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어줄, 슈퍼마켓 유랑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