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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걸 Jun 18. 2020

발코니가 있는 삶

아파트에 허락된 한 평 남짓한 자연

두해 전 광화문에서 살 때였다. 


서대문역 근처 신축 브랜드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내던 날, 넌지시 외관을 구경하던 차 소위 새시 없는 발코니에 시선이 멈췄다. "요새 발코니 딸린 아파트가 있네? 그것도 말고 안방 침실에!" 실평수를 늘려 매매가를 높일 목적으로, 대게는 거실을 최대한 넓힐 목적으로 '터왔던' 서울의 무수한 아파트 베란다가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베란다는 대부분 창고처럼 쓰였다. 아이 자전거, 캠핑장비, 골프채 가방,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켜켜이 쌓인 공간은 안도 밖도 아닌, 제3의 공간이었다. 어쩌다 발코니를 잘 가꾼 집에서는 작은 화단을 만들거나, 카페처럼 사용하기도 했지만 발코니는 온전히 집 안의 영역이었다.


1층 아랫집 아이들이 알록달록 칠한 낙서는 우리집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선물 같은 풍경이다
선베드에 누워 일광욕하고
노을 지는 해를 바라보며 부부 만의 티타임
대각선 윗집 아랫집과 손 흔들며 안부 묻는 삶 

    

미국에서 아파트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분류다. 은퇴 뒤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고 자신 만의 여가를 즐기는 노인들, 편리함을 추구하는 싱글족, 그리고 마지막은 딱히 오래 거주할 주택을 정하지 못해 한두해 임시로 거주할 요량인 우리처럼 외지에서 온 이들이다.  예외는 있지만 내가 만나온 이웃은 약속이나 한 듯 대부분 위의 세 가지 항목에 해당되곤 했다.


아파트 베란다의 매력에 빠진 것은 코로나 사태로 자가격리에 돌입한 뒤였다. 하루 종일 좁은 집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 번씩 맑고 청량한 공기가 필요했는데, 그때마다 딱히 나설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집 밖은 위험해'였던 시절, 한평 남짓한 발코니는 온전히 안에서 밖으로 잠시 빠져나오는 일탈의 공간이곤 했다. 처음에는 허리춤 높이의 펜스에 둘린, 3면이 외부로 고스란히 뚫린 구조에 혹시라도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제대로 서지를 못했다. 발코니 바닥에 엉거주춤 구부리고 앉아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왜 세상에서 사람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는 말도 있지 않나.


밖에서 바라본 발코니 풍경. 미네소타 아파트 발코니는 모두 이렇게 밖으로 돌출된 형태다

처음에는 무서워 제대로 서지도 못했던 발코니도 한 번, 두 번 문을 열고 나가면서 익숙해졌다. 볕이 좋을 때면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아이의 책을 읽어주거나 함께 보드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시선을 돌리면 저 대각선 방향의 이웃과 눈인사를 하게 되고, 아랫집에서 "Hi!"라는 인사를 올려 보내기도 한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건네는 발코니에서의 안부는 코로나 시대에 가장 안전하게 이웃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가끔 산책하다 이웃집 발코니를 올려다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어떤 집은 이른 아침부터 책 한 권을 가지고 나와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부부가 나란히 밖을 내다보며 차를 마시는 집도 보인다. 키우는 식물과 화분 디자인은 또 어떤가. 요즘 유행하는 테라코타 화분, 온갖 종류의 허브와 이름 모를 서양 꽃들이 성냥갑처럼 무료하게 선 아파트에 악센트를 더한다. 


베란다 프로젝트 두 달 만에 무럭무럭 자란 깻잎과 토마토 그리고 아이있는 이웃들에게 나눠 준 봉숭아

 

드넓은 마당을 갖고 있진 않지만, 그래서 여전히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한계를 드러내지만 아파트에 하늘과 맞닿은 온전한 발코니가 있다는 건 코로나 시대의 큰 행복이다. 아침저녁으로 베란다에 나가 채소에 물을 주고, 우리가 건넨 봉숭아 모종이 열심히 자라고 있는지 이웃들의 화단을 한 번씩 점검하는 것은 소소한 재미다. 그러다 1층 집 아이가 홀로 나와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 한 번씩 이름을 부르곤 한다. "please come over!" 놀러 오라는 그 말은 어찌나 반가운 것일까. 코로나로 조심스럽지만 야외에서 아주 잠깐은 괜찮지 않겠냐고 서로 동의한 아이 엄마와 종종 베란다에서 플레이 타임을 갖기도 한다. 그 매게의 공간 또한 발코니다. 


아파트 1층 발코니는 바로 공용 잔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이른 더위로 모처럼 물을 받아 수영장 개시!


코로나가 야기한 자발적 고독과 격리의 시대. 이방인으로써 완벽한 고립을 겪던 우리 가족은 아파트 발코니를 통해 몇몇 이웃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커뮤니티가 아닐까. 반경 1km 이내의 지역 상권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심적 위안은 물론 가족의 건강을 담보하는 지금, 나에게 발코니는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실제로 <포비스>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집을 고르는 뉴요커들의 태도도 변화했다고 한다. 전철역 근처 역세권은 더 이상 필요치 않고, 근처에 반려견 산책이 가능한 공원이 있고, 맑은 공기를 잠시라도 마실 수 있는 발코니 딸린 아파트와 독립적인 마당을 쓸 수 있는 타운하우스가 인기라고.  


오늘도 외롭지 않기 위해 발코니로 나간다. 조깅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혼자 사는 세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발코니는 밖을 내다보고 그들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연결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어요. (Balconies are reminding people of the importance to look outside and connect with something bigger than themselves) _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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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4if1A7QZbYw&t=1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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