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본능적으로 설정한 '주관적 적정 거리'가 있었고,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그 거리를 침범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꽤 살벌, 냉정, 심지어는 잔인(?)하게 굴었던 것 같다. 오지랖이 넓은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분위기상 커갈수록 세상에 대해 더욱 차갑고 방어적인 자의식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향 때문에 '공간'에 은연중에 더욱 의미를 부여했을 수 있다. '거리두기'가 성립할 수 있으려면 물리적 혹은 정서적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나는 어쩌면, 처음 나만의 공간을 가졌을 때부터 꽤나 예민하게 '공간 감수성'을 키워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공간'이라는 개념, 보다 정확하게는 공간을 통해 '독립된 자아'를 인지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입학하며 내 방이 처음 생겼을 때였던 것 같다.
처음 내 방에 책상이 들어왔을 때의 날아갈 것 같던 기분, 외고 입시에 떨어지고 겪게 된 생애 최초의 좌절감에 아이와 워크맨에 이문세 7집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옛사랑을 들으며 이불 뒤집어쓰고 울음소리 샐까 숨죽여 꺽꺽거리던 날들이 아직 선명하다.
이후 이사 간 새로운 집의 내 방엔 다락까지 있었는데, 정말 나만의 비밀의 공간이었다. 다락에 카세트 플레이어와 공테이프를 들고 올라가 당시 푹 빠져있던 디즈니 인어공주의 'Part of Your World',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 등 디즈니 여주인공의 주제가들을 목청 높여 부르며 녹음 뜨고 자뻑하고(??)를 반복했던 기억도 난다.(부끄럽다..) 그 당시 내 방, 내 다락은 인어공주가 난파선에서 발견하여 아버지인 바다의 왕 몰래 인간세계의 보물을 모아둔 창고이자, 자스민이 알라딘과 함께 양탄자를 타고 누리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 시절은 내가 최초로 물리적 공간의 분리를 통해 부모로부터 '독립된 나'라는 개념을 인지한 것일 뿐, 공간에 대한 취향이나 책임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여전히 나는 미성년자였고, 부모와 한 지붕 아래에서 부모의 일방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시기였다.
공간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보다 독립적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 학부 시절 멕시코 어학연수를 갔을 때였다. 물론 멕시코에서도 여전히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보다는 더욱 뚜렷해진 자의식, 중고등학교 시절의 몫까지 더해 한꺼번에 찾아온 사춘기(a.k.a. 대 2병), 부모님이 자식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강도로 통제할 수 없게 된 물리적 거리가 주는 해방감(;;), 동시에 처음 겪어보는 이국 땅에서의 불안과 도파민의 최대치를 넘나드는 생존 본능으로 인해 '나만의 공간'에 대한 자의식을 남들보다 예민하게 발달하게 된 것 같다. 내 방조차도 멕시코라는 낯선 나라의 일부였지만, 나만의 공간에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 여기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간에 대해 내가 관여할 수 최대치는 홈스타일링, 즉 물리적인 공간 꾸미기 뿐이었지만 나름대로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임했었다. (지금이라면 공간 기획에 공사 일정까지 각잡고 달려들겠지만..)
나도 모르게 최적의 동선과 사생활을 고려하면서 공간의 가구 배치를 구상하고, 빈 공간은 무엇으로 어떻게 꾸밀지 아이디어를 얻고 싶어 월마트를 가도 늘 가구 섹션이나 홈 데코 코너를 둘러보고, 꼬요아깐의 기념품 노점상을 가서도 그냥 보기에 예쁜 게 아닌 패브릭과 소품 간의 조합을 늘 시뮬레이션해보곤 했었다.
그렇게 정성과 진심을 다했던 공간에서 나는 11개월짜리 시한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페인어를 사랑했기에 어학연수 공부도 열심히 했고, 너무나 좋은 친구들을 만나 그들을 나의 공간으로 초대해 열심히 수다도 떨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K-푸드 민간 외교도 하고, 열심히 스페인어권 음악 CD와 쿠바 음악 잡지들 사모아서 읽고 들으며 내 공간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공간에 대한 관심은 실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뇌가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는 뇌과학의 원리 때문인지, 모험심만큼이나 생존본능도 큰 편인 내게 생애 처음으로 겪어보는 낯선 나라는 나를 둘러싼 환경의 모든 요소를 허투루 넘길 수 없게 했고, 오감이 있는 힘껏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어학연수를 오기 전 1종으로 운전면허를 땄음에도 어느 정도(??) 길치 + 공간 지각 능력의 결핍이 있었던 것 같으나, 이는 멕시코에서 산 지 1년도 안 되어 싹 고쳐졌다. 스페인어로 된 종이 지도를 읽어내고 그 정보를 물리적으로 적용해 낼 수 있어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야 주변 사람들에게 내 목적지 및 경로 관련 도움을 받거나, 여행을 하거나, 친구들과 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도 단지 태평양을 건너왔을 뿐인데(?) 숨 쉬는 공기도, 하늘과 바다의 빛깔도, 땅의 내음도 이토록 다를 수가 있을까 신기했고, 이 거대한 자연의 공간이 인간의 문명에 의해 건축된 실내 공간의 질감까지도 이토록 다르게 형성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그 당시 경험한 멕시코의 실내 건축은 기술과 편의성면에서는 당연히 한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자연의 풍광은 광활하고 척박하고 황량하면서도 강렬했다. 눈부시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어딘가 애잔하게 만드는 묵직하고 농도 짙은 원색의 색감을 한국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게 아쉽기도 했다.
꼬요아깐의 프리다 깔로의 생가의 인디고 블루, 레알 데 까또르세의 황량한 사막이 뿜어내던 척박한 그레이 월넛, 건조하고 뜨거운 봄날 뜨거운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하까란다의 짙은 보라색은 소깔로의 광장에, 소나 로사의 중심가에, 내 방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조각내던 나뭇잎에 짙게 배어있었다.
한창 어리고 어리석어 젊음이 소중한 줄 모르고 낭비하던 시절, 아픈 마음으로 쿠바에 갔었다. 당시는 2002년으로 쿠바는 우리나라의 수교국이 아니었기에 대사관도 없었는데,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지만 혼자 갔다. 혼자 가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진짜로 쿠바가 궁금했던 게 아니라, 쿠바라는 이름의 가상의 도피처를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도인 아바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그리고 아바나 근처의 대표적 휴양지인 바라데로를 도는 자유여행 코스였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쿠바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비현실적인 나라였다.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 이후 대부분의 외부 세계와 교류가 차단된 체 자생해 온 나라여서 그런지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는 비현실적인 이질감이 공간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양립하기 어려운 풍경들이 묘하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뒤섞여 있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낡은 건물들의 벽에 기대어 공허한 눈빛으로 현실에 안주한 행복을 설파하는 현지인들, 외국인들만 입장이 허락되는 ATM기나 모던한 통신 서비스 대리점 옆에 쿠바 달러만 받는다로 소리치는 현지인들만 바글거리는 노점상, 빔벤더스나 헤밍웨이가 앉아있을 것 같은 고풍스러운 살사 바 옆에 쿠바 시가 싸게 줄 테니 나 따라오라고 낡아빠진 택시로 손짓하는 어린 소년..
며칠에 불과했지만 쿠바를 여행하는 동안 이 사람들에게 시간, 자아, 행복, 경쟁, 성취 같은 건 어떤 개념일까.. 이 사람들에게는 내일이라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꽤 자주 들었었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삶과는 거의 대척점에 있다시피 한 현지인들의 삶을 통해 나를 그나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쿠바 여행을 계기로 의도치 않게 대 2병을 크게 호전시킬 수 있었다.
+
쿠바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과는 별개로 2002년의 바라데로 해변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낙원을 찾기 위해 도망치는 여행을 통해 내가 봉착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끔은 나를 둘러싼 공간을 획기적으로 바꿔보는 것도 시야를 넓히고 세계관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저 새로운 세상을 보고 듣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나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시절의 경험들은 이후의 내 삶에 정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