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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Aug 12. 2022

나-데이터=?

전시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처음 인스타그램이 생겼을 때 너무 피상적이고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들이 거기서 거기인 자신들의 일상을 노출하고 전시하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에 카메라 기능이 달리기 시작했지만 해상도가 떨어졌기에 중요한 날에는 여전히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고심해 몇 컷을 찍고,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전공한 나에게 이미지는 문자만큼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일상의 사소한 것들까지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그걸 하나둘 인스타그램에 올리다 보니 처음의 이질적이었던 감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세계에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살아가는 방식까지 그것에 맞춰졌는데 인스타그램 속 사람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집에만 있다 밖으로 나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린다든가, 여행을 할 때 그곳에 가기도 전에 포토스팟을 이미 꿰고 그곳에서 찍을 사진의 포즈와 캡션 문구를 미리 생각해둔다거나 하는 것이다.

재작년 본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서도 IT 기업들이 단순히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하여 광고주에게 넘김으로써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더 큰 목적은 우리의 행동과 인식을 기업이 원하는 방향대로 서서히 변화시키고, 우리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기술이, 다시 우리를 만드는 것.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글로벌라이제이션에도 세상은 여전히 암담하고 계급 분화는 심화되고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전혀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기술과 데이터가 자본, 권력, 정치와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세계, 그리고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를 다루는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 《데이터의 바다》에 다녀왔다.


히토 슈타이얼은 시각예술가이자 비평가로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고 해서 전시를 보고 나서는 그의 책도 찾아보았다.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은 인간의 시공간적 방향감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다룬다.

서양 르네상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시각을 오래 지배해온 선형 원근법은 슈타이얼에 따르면 1) 지표면의 만곡이 무시된 안정적인 수평선, 2) 하나의 소실점을 주시하고 있는 관찰자를 상정한다. 그리고 이는 실제 땅의 울퉁불퉁함(다양성)을 소거하고, 단일한 주체의 시선 아래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식민주의,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의 확산의 길을 열어주었다.

회화와 영화의 실험을 거쳐 선형 원근법이 무너진 자리에 현재 가장 보편화된 시선은 수직 원근법이다. 비행 기술, 위성, 드론 등의 발달로 조감도나 항공 이미지를 보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리드로 이뤄진 인스타그램을 조망하는 것도 수직 원근법이 적용된 시선이지 않을까 싶다.) 이는 군사, 감시, 엔터테인먼트 등에 다양하게 쓰임으로써(인스타그램 등 플랫폼에서 수집한 개인정보 및 데이터로 수익을 내는 것을 '감시'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이쯤 되면 놀랍지 않다.) 수직적인 계급을 더욱 강화시킨다. 우월한 지위의 관람자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선형 원근법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급진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수직 공간에서 슈타이얼은 groundless한 자유낙하를 상상해 보라고 주문한다. 바닥, 즉 근거가 없는 세상은 불안하고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겠지만 거기서 새로운 유형의 시각들이 탄생한다.

주저 없이 객체를 향하고, 힘과 물질의 세계를 포용하며, 그 어떤 근원적 안정도 없이, 개방의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번뜩이는 낙하. 고통스러운 자유, 지극히 탈영토적이며, 따라서 언제나 이미 미지의 대상인 것. 낙하는 폐허와 종말, 사랑과 방치, 열정과 굴복, 쇠퇴와 파국을 뜻한다. 낙하는 타락이자 해방이고, 사람이 사물로, 사물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상태이다. 낙하는 우리가 견디거나 즐길 만한, 포용할만하거나 고통스러운, 혹은 간단히 말해 현실이라 받아들일 그 구멍에서 벌어진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응시로 통일되지 않는 다채널 영상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요즘 미디어 아트들은 여러 화면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고 길이도 길어 모두 보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이번 전시도 종일을 잡고 갔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에 각 작품 당 일부만 보고 자리를 떠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고려하고 만든 작품들이 아닐까. 부분 부분을 엮어 나만의 감상과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것도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리핑되어 유통되는 영상과 이미지를 다룬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도 재밌었다. 빈곤한 이미지는 업로드되고 재포맷되고 재편집되고 다시 전송되면서 화질이 낮아진 이미지를 일컫는다. 어쩌면 고화질을 선호하는 소비자나 영화광에게는 외면받는, 또 어쩌면 불법 유통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슈타이얼은 여기서 긍정적인 면을 보는데 신자유주의로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진 비상업적 실험영화, 에세이 영화 등이 묻히는 게 아니라 다시 부활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빈곤한 이미지는 익명의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마찬가지로 공유된 역사를 창조한다. 이동함에 따라 동맹을 만들어내고, 번역 혹은 오역을 이끌어내며, 새로운 공중과 논쟁을 창조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자신의 시각적 실체를 잃음으로써 일말의 정치적인 가격을 회복하고,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한다. 이 아우라는 더 이상 '원본'의 영원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본의 무상함에 발 딛고 있다. 더 이상 국민국가나 기업의 틀에 의해 매개되고 지원받았던 고전적인 공공 영역(public sphere)에 닻을 내리고 있지 않으며, 일시적이고 의심스러운 데이터 저장소의 표면을 부유한다. 영화관의 저장고로부터 표류함으로써 그 이미지는 분산된 관람자의 욕망으로 직조된, 새롭고 덧없는 스크린 위로 몰려간다.

물론 슈타이얼은 이를 낙관하지만은 않고 자본주의에 포섭될 위기를 넘어 베르토프가 말한 "시각적 유대"를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단순한 정보 교환이나 유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직하는 것으로 링크를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시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를 바탕으로 기술이 예측하는 대로 행동했던 것 같아 점점 무서워지려던 찰나, 정말 방법을 알려주나 싶어 진지하게 본 <안 보여주기: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MOV 파일>. 안 보이게 되는 방법으로 빈곤한 이미지를 일컫는 듯한 "불량 화소 되기"와 함께 "무등록자 되기, 필터에 걸린 스팸 되기, 국가의 적으로서 실종자 되기, 은폐되기"를 제시한다. 이 단어들에 정이 가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수직의 시선에 벗어날 방법으로 요즘 구상 중인 지하세계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상에 갈 곳이 없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모여 사는 곳으로 처음 상상을 하였으나 위성과 기존 권력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에서 데이터를 제공하는 존재로 전락했다지만, 나에게서 데이터화 될 수 있는 부분들을 빼더라도 이런 생각이 남기에 나는 나이지 않을까.




ps.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는 것까지 그만둘 수는 없었다. 2010년부터 5년 동안 빌보드 차트 노래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영단어를 조합한 것이라는 <Hell Yeah We Fuck Die>. 내 유튜브 채널 이름이 Yeah! 주연인 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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