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의 『이스탄불』, 알리의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경유하여
지난 8월 약 10일 동안 튀르키예(구.터키)에 다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020년 2월 중국 여행과 3월 런던 출장을 연달아 취소하고
조금 잠잠해지나 싶어 2021년 12월 하와이 티켓을 끊어놨다 오미크론이라는 변이 때문이 다시 거금의 수수료를 물고 취소한 뒤로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동안 체력이 떨어졌는지 다녀오고 나서 2주 정도는 헤롱헤롱 했다.
그래서 추석 연휴 때에서야 사진을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아니,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같은 날 같은 옷을 입고 두세 도시에 가는 등 아무래도 전지훈련급으로 일정이 빡셌던 탓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생애 처음 패키지 여행으로 다녀왔다.
같이 간 부모님이 그동안 패키지 찬양을 해왔기에 나도 솔깃했던 것.
튀르키예를 잘 모르기도 하고 직장인으로서 여행 계획을 짜는 것도 부담스럽던 차
사전에 준비할 것도 없이 역사와 배경 지식을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는 게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에 많은 것을 보려다 보니 새벽 4시부터 움직여야 하는 데다, 사고 방지를 위해서인지 자유시간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포토 스팟에 내려다 주면 사진만 찍고 돌아올 뿐이었다.
여행의 많은 기억이 목적지에서의 감상뿐만 아니라 그곳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든가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로 이뤄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녀온지 한 달도 안되었는데 지금 벌써 튀르키예에서의 기억이 희미하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우여곡절 끝에 튀르키예에 정착해 지금은 수십 명으로 이뤄진 단체를 능수능란하게 이끄는 가이드의 모습은 존경할 만하긴 했지만
그의 설명 중에는 튀르키예를 잘 모르는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춘 탓인지 일반화하고 인종차별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멘트들이 많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나마 여행 전후로 관련 책을 읽어 그래도 튀르키예라는 나라와 이번 여행의 경험이 조금 덜 납작해진 것 같다.
그중 하나 사바하틴 알리의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소설 자체가 편견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가련하고, 심지어 가장 바보 같은 사람도 깜짝 놀랄 만큼 복잡한 영혼을 지니게 마련이다. 우리는 왜 이러한 내면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섣불리 이해하고 손쉽게 판단하는가?
- 8p.
화자가 직장에서 만난, 모두에게 무시받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라이프 에펜디의 과거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을 현상태 또는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내용이다.
라이프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사업에는 관심이 없이 예술에 빠져 살다 아버지에 의해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 보내진다. 거기서도 세상사나 다른 사람들은 다 피상적이라고 느끼며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다 한 자화상과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마리아 푸데르에게서 자신과 닮은 영혼을 발견한다. 라이프와 마리아는 상대와의 교감이 그렇고 그런 남녀 사이의 사랑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 와중에 라이프는 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터키에 돌아가게 되고, 마리아와 연락이 끊긴다. 아티스트이자 생계를 위해 밤무대에서 가수로 일하는 마리아의 남자관계를 의심하며 배신을 당했다 생각한 라이프는 그 후 아무도 믿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고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이 또한 라이프의 편견/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사실 마리아는 자신의 아이를 낳다 죽은 것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소설이지만 1943년도에 출간되었음에도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는 섬세한 묘사와 진보한 여성상 때문일 것이다.
라이프가 반한 마리아의 자화상은 사르토의 성모 마리아상을 닮았다고 그려지는데, 라이프는 이 마리아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까지 본 모든 성모 마리아 그림은 마리아를 너무나 순진무구하게 표현해서 작품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이런 그림들에서 마리아는 때로는 품에 안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보셨지요? 신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하사하셨는지!”라고 말하고 싶은 어린아이 같았다. 때로는 이름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은혜로 잉태하는 바람에 느닷없이 인생에 끼어든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하녀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르토의 그림 속 성모 마리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세상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양쪽에 간청하듯 서 있는 성인들에게도, 품에 안고 있는 메시아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땅을 내려다본다. 그녀의 눈은 분명 땅에 있는 뭔가에 고정돼 있었다.
- 97-98pp.
마리아가 둘 사이를 평범한 남녀 관계로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여성을 수동적이게 만드는 일반적인 성역할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튀르키예=)이슬람 국가의 여성상 했을 때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진보적인 모습이다.
사실 나는 십여 년 전 스무 살 때 이스탄불을 며칠 여행한 적이 있다.
(라이프와 마찬가지로) 베를린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방학을 이용해 이탈리아-그리스-터키를 다녀온 것이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 두 대륙으로 이뤄져 있어서
당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몇 개월 만에 아시아 땅을 밟았다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개방적이었기에
히잡을 쓴 여성과 현란한 색깔의 염색 머리의 여성이 나란히 지나가는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동양과 서양, 이슬람과 세속이 뒤섞인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번에 보니 튀르키예라는 나라 전체가 보스포루스가 잇는 흑해, 마르마라해 뿐 아니라 에게해, 지중해를 접하고 있어 여러 문화권이 만나는 곳이었다.
비잔티움 시절 고대 그리스 유적으로 이뤄진 관광지가 있는가 하면, 오스만 제국을 창시한 오스만 1세의 묘지가 있어 순례 여행을 하는 아랍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 『이스탄불』에 따르면 이스탄불은 이전에 훨씬 더 코즈모폴리턴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요세프 [브로드스키]가 이스탄불에 관해 했던 “여기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노후되었다. 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래되었다는 의미도,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노후되었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의 말은 옳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해 사라지고, 터키 공화국이 무엇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터키주의 이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단절되자, 이스탄불은 과거의 다언어와 승리와 화려한 날들을 잃어 가고,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노후되어 가고, 한적해지고, 텅 비고, 흑백의 단일음과 단일어만이 있는 곳으로 변해 갔다.
내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이스탄불은 도시의 세계주의 구조가 급속도로 사라지는 곳이었다. 1852년, 내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고티에는 이스탄불 거리에서 터키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가(그는 마지막 두 언어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중세 스페인어가 근간이 된 히브리어를 첨가했어야만 했다.) 사용되는 것을 보고, 이 ‘바벨탑’에서 이 언어들 중 몇 개를 동시에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처럼 자신이 프랑스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모른다는 것을 약간 부끄러워했다. 터키 공화국이 설립되고 통치가 지속되자 이스탄불의 터키화가 강화되었고, 정부가 도시에서 실시했던 일종의 인종 청소는 모든 언어를 고갈시켜 버렸다.
- 330p.
파묵은 이렇게 오스만 제국 멸망 후 폐허가 된 자신의 고향 이스탄불을
대가족이 한 아파트를 지어서 함께 사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삼촌이 사업 실패로 돈을 다 까먹으면서 몰락해 가는, 그 때문인지 항상 싸우고 번갈아 집 나가는 부모가 있는 자신의 개인사와 겹쳐
비애의 도시로 묘사한다.
비애는 개인의 멜랑콜리와도 다르고, 가난하고 무기력한 현지인들에 대한 외부인들의 죄책감이 깃든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도 다르다. 내부에서 그리고 과거의 영광에서 나오는, 튀르키예인들이 짐짓 자랑스러워까지 하는 감정인 것이다.
주변에 튀르키예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지금 튀르키예 화폐 가치가 폭락을 해 여행하기에 딱 좋겠다는 말이었다.
경제 파탄의 원인을 알고 나자, 그리고 그렇게 바닥난 국가 이미지를 바꿔 보겠다며 낸 묘안이 국명을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바꾸는 거였던 지도부의 어이없는 모습을 보자, 튀르키예 국민의 심정에 이입해 마냥 좋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정취를 여행에서 직접 느낄 수 있으려나 했지만 단체로 빡빡한 일정으로 이동하는 중에는 쉽지 않았다.
이번에 튀르키예 전체 그림을 그렸으니 다음에는 자유여행으로 여유롭게 다녀보고 싶다.
파묵이 나열한 아래 풍경을 찾아...
나는 어둠이 일찍 깔린 저녁 변두리 마을의 가로등 밑에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속되는 불황 이후 상점에서 하루 종일 추위로 덜덜 떨면서 손님을 기다리는 늙은 책방 주인, 불경기 때문에 사람들이 면도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이발사, 손에 양동이를 들고 텅 빈 선창에 묶인 낡은 보스포루스의 배를 닦으면서 먼 곳에 있는 흑백텔레비전을 바라본 후 배에서 잠에 빠질 선원, 네모난 돌이 깔린 좁은 길에서 자동차들 사이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한적한 버스 정거장에서 손에 비닐봉지를 든 채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스카프를 쓴 아주머니들, 낡은 해안 저택의 텅 빈 보트창고, 실업자들로 가득한 찻집, 여름밤 도시의 가장 넓은 광장에서 술 취한 관광객을 만날 거라는 희망으로 신발이 닳도록 인도를 어슬렁거리는 포주, 겨울 저녁 서둘러 배를 타려고 달려가는 군중, 밤마다 도무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커튼 사이로 거리에 내다보는 여자들, 사원 마당에서 종교 소책자, 염주, 장미 향수를 파는 테두리 없는 납작한 모자를 쓴 노인들, 수만 채의 아파트 건물의 서로 비슷비슷한 입구, 작은 궁전 같은 저택이었다가 나무 바닥이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시청 건물로 변한 목조 가옥, 텅 빈 공원의 고장 난 시소,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 비잔틴 시대 유적이자 폐허로 남은 도시의 수도교, 저녁 무렵 텅 빈 시장, 폐허로 변한 오래된 테케 건물, 더러움, 옥, 그을음, 먼지로 인해 외벽의 색이 사라져 버린 수천 채의 아파트 건물, 조개와 이끼로 덮인 녹슨 부표 위에 앉아 비를 맞으며 꼼짝하지 않는 갈매기들, 가장 추운 날에 굴뚝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나오는 100년 된 커다란 저택,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수많은 남자들, 추운 도서관 열람실, 거리의 사진사들, 천장에 금박 칠이 된 극장이었다가 남자들이 부끄러워하며 들어가는 포르노 영화관으로 변한 장소들에 밴 입내, 해 진 후 한 명의 여자도 보이지 않는 거리, 더운 남풍이 부는 날 시당국의 통제 하에 있는 매음굴의 문 앞에 모여 있는 군중, 고기 할인 판매점 앞에 줄지어선 젊은 여자들, 종교 축일에 첨탑들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 건 마흐야의 희미한 전등들, 여기저기 찢겨지고 낙서가 된 벽보들, 서양 도시에 있었더라면 박물관에 옮겨졌을 테지만 도시의 더러운 거리와 비탈길에서 돌무쉬로 변신하여 사람들을 가득 태운 채 헉헉 신음하는 1950년대 허름한 미국 자동차들, 사람들로 꽉 찬 버스들, 지붕의 납 도금과 비 홈통을 계속해서 도둑맞는 사원, 도시 안에서 두 번째 세계처럼 살아가는 묘지들과 사이프러스 나무들, 카드쾨이-카라쾨이 구간 배 안에 켜져 있는 희미한 전등,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휴대용 휴지를 팔려고 하는 어린아이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계탑, 아이들이 역사책에서 읽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와 저녁에 집에서 맞는 매, 선거 인구조사, 테러리스트 수색 핑계로 자주 선포되는 통행금지 시간에 겁에 질려 ‘공무원들’을 기다리는 것, 신문의 한 구석에 끼워 놓은 “우리 마을에 있는 370년 된 돔이 무너진다,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같은 아무도 읽지 않는 독자 편지, 도시의 가장 붐비는 곳에 있는 지하도와 육교의 제각기 다른 형태로 깨져 있는 계단 가장자리, 사십 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이스탄불 엽서를 파는 남자,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거지,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하는 거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와 배, 지하상가, 통로에서 갑자기 코에 와 닿은 지독한 화장실 냄새, 《휘리예트》 신문의 ‘귀진 아블라’ 고민 상담 칼럼을 읽는 처녀들, 위스퀴다르 지역의 창문을 붉은빛 나는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는 일몰,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 이외에 모든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 아침 그 이른 시간, 귈하네 공원에 있는 동물원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곳의 철책 안에 있는 두 마리 염소, 지루한 고양이 세 마리, 나이트클럽에서 미국 가수와 터키의 유명 스타들을 모방하는 삼류 그리고 일류 가수, 영어 수업에서 그 누구도 육 개월 동안 예스와 노를 말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지루해하는 아이들, 갈라타 부두에서 기다리는 이주민들, 겨울 저녁 파장 뒤 남은 채소, 과일, 쓰레기, 종이, 비닐봉지, 자루, 상자, 궤짝, 시장에서 부끄러워하며 흥정을 하는 스카프를 쓴 젊은 여자들,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겨우 걸어가는 젊은 엄마, 갈라타 다리에서 에윕을 바라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할리치 모습, 부두에서 손님을 기다리면서 넋을 잃은 채 풍경을 바라보는 시미트 장수, 매년 일 분 동안 온 도시가 아타튀르크를 기어갛기 위해 부동자세로 있을 때 먼 곳에서 동시에 울리는 뱃고동 소리, 보도블록 위에 아스팔트, 아스팔트 위에 아스팔트를 깔고 깔아 한때는 계단으로 올라갔던 곳이었다가 지금은 길 밑에 들어가고 수도꼭지마저 도난당한 채 대리석 더미로 변한 수백 년 된 마을 분수, 나의 어린 시절에 중산층 가정, 의사, 변호사, 교사가 아내와 아이와 저녁에 라디오를 들었던 옆 골목에 있는 아파트에서 지금은 빽빽이 붙어 있는 오버로크와 단추 만드는 기계 앞에서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아침까지 가장 낮은 임금으로 일하는 처녀들, 깨지고 부서지고 낡아 버린 모든 것들, 모든 도시 사람들이 가을이 다가올 때 발칸, 동아프리카나 남아프리카에서 와서 남쪽으로 가면서 보스포루스의 섬들 위를 지나가는 황새들을 바라보는 것, 내 어린 시절에 매번 완패로 끝난 국가 경기 후에 담배를 피우며 집으로 돌아가는 수많은 남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