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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Dec 18. 2020

"스탈린이 죽었데" 그래서..?

스탈린이 죽었다!(2017) 리뷰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역사책이 손수 스포일러를 해준다는 점입니다. 우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편하게 해당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명량(2014)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지 조마조마 하지 않아도 되고, 남산의 부장들(2020)을 보면서 박통 암살이 실패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지게 되죠. 그리고 이건 동시에 단점이기도 합니다. 영화 관객들이란 본디 약간의 마조히스틱한 기대감을 품고 영화관에 들어가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까, 저 영화가 내 뒤통수를 한 대 쎄게 후려쳐 줬으면 하는 그런 기대감 말입니다. 근데 역사 기반 영화에선 그런 뒤통수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엔딩이 날지 다 아니까요. 결국 스포일러를 당하기 싫으면 모든 의무교육을 포기하고 산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그러면 비극적이게도 부모님이 구속됩니다. 순간의 쾌락과 효, 둘 중 어느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별빛으로 속삭이시는 공자님께선 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아무튼


스탈린이 죽었댑니다.

어쩌지 싶습니다. 아니 사실 완전히 죽은 건 아닙니다. 사지에 미동도 없지만 숨은 쉬고 있었거든요. 결국 연방의 위대하온 지도자 동무들은 스탈린의 집무실에 올망졸망 모여들어 다음과 같은 심각한 토의를 하게 됩니다.

"누가 스탈린 동무의 머리를 잡지?"

아니 그러니까 건넌편 침실로 스탈린 동무를 옮겨야 하는데 누가 머리를 잡고 누가 왼팔을 잡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감이 딱 오죠.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란 걸.


우리는 다 압니다. 스탈린이 결국은 죽을 것이고, 베리야는 숙청될 것이며, 이후 브레즈네프가 정권을 장악하리란 걸요. 그래서 감독은 이런 굵직한 사실들만 내버려둔 채 역사를 달달 볶기 시작합니다. 블랙코미디란 향신료를 팍팍 쳐가면서요. 수뇌부란 양반들이 스탈린의 마지막 단말마를 신명나게 오독하질 않나, 아내가 굴라그에서 출소한 줄도 모르고 아내를 욕하다가 아내에게 들키질 않나, 스탈린 관짝을 둘러싸고 가족오락관을 찍고 있질 않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스탈린의 장례식.

그러면서도 영화는 코미디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갑니다. 코미디, 웃음은 상당히 강력한 서사적 용매입니다. 자칫하면 많은 중요한 것들을 희석시켜버리기 십상이죠. 하지만 웃음이 우리의 눈을 가리려는 순간, 영화는 잽싸게 우리를 현실로 데려옵니다. 조금 전까지 스탈린의 별장에서 병신짓을 하던 수뇌부들을 보여주던 영화는 곧바로 스탈린 별장에서의 학살을 보여줍니다. 스탈린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 수십에게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죠. 돼지 같은 베리야를 코믹하게 묘사하다가도 그가 어린 소녀를 겁간했음을 암시하여 우리의 표정을 굳게 만들죠. 영화는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풍자하지만, 동시에 그들 그리고 그 시대의 잔인함을 언뜻언뜻 조명합니다. 영화에서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그들 또한 독재 정권의 수하로서 근대사의 음습한 부분을 담당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역사 기반의 영화들은 '역사를 알고도 재밌는 영화'를, 나아가 '역사를 알아야 더 재밌는' 창작물을 지향해야 합니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전자와 후자를 모두 충족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알고도 코미디를 즐길 수 있고, 역사적 사실을 안다면 자신이 역사책에서 본 사람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감상할 수 있으니까요. 잘 만든 영화입니다.


아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대놓고 무시하고 비틀어버리는 영화들도 존재합니다. 엥 이거 완전 역사왜곡 아니냐?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영화들은 '이건 창작물이다'라는 분위기를 영화 전반에 걸쳐 뿜뿜함으로써 이런 논란들을 피해갑니다. 이런 영화들이 무엇이 있냐고요? 바스터즈(2009), 원스 어폰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정도를 예시로 들 수 있겠군요. 더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니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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