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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Dec 19. 2020

정말 위 아래가 없는 영화

그래비티(2013) 리뷰

격동의 8/90년대를 살아오신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동네 놀이터마다 설치되어 있던 원심분리기를 말입니다. 용도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넣고 돌려버리는 것이었죠. 무시무시한 회전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원심력과 예절을 배우게 됩니다. 다들 내리자마자 공손하게 무릎을 꿇더라고요. 그리고 이 형벌을 거부한 아이들은 정글짐에 수감되는 게 관례였죠. 간혹 회전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적인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제 친구도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습니다. 대학원에 갔거든요.

 

원심분리 뺑뺑이

잠깐, 그런데 뭐라고요?요즘 어린애들은 이런 거 안 타고 논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요즘 어린애들이란 게 어딨습니까. 저 2009년 이후로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칠드런 오브 맨(2006) 정도는 봤단 말입니다. 참고로 이 영화도 그래비티를 찍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또 다른 수작이니 한 번 관람을 권합니다.  무튼


그렇게 빙글빙글 돌다가 튕겨져 나와 풀썩 모래바닥에 누워 봅니다. 좀 전까지 빙빙 돌던 세상에 한 순간에 명료해집니다. 등을 기대니 땅이고, 올려다보니 하늘입니다. 좀 전까지 세상에게 원심분리를 당했었더라도 어쨌거나 우리의 두 발은 땅을, 머리는 하늘을 향합니다. 위, 그리고 아래. 그것은 하나의 질서이고, 그 질서는 지엄한 중력의 법전에 의해 유지됩니다. 하지만 우주에 그딴 건 없습니다.


이 영화는 초장부터 화면을 빙글빙글 돌려댑니다. 하지만 그 회전은 놀이터 뺑뺑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죠. 뺑뺑이에서 튕겨져 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회전축에서 수직 방향으로 멀어지죠. 하지만 우주는 아닙니다. 어디로든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어디로든 떨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상하전후좌우 모든 방향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중력이라는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공간이기 때문이죠. 니체는 그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네가 별들을 아직도 "네 위에 있는 것"으로 느낀다면, 너에게는 인식의 시야가 아직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위는 아래라는 기준이, 아래는 위라는 기준이 있어야 성립하죠. 니체는 이러한 기준조차 탈피하라 말하고 있죠. 우주란 참으로 그런 곳입니다. 모든 방향과 기준의 의미가 무화되는 곳, 그래서 오직 나 스스로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곳. 그래서 그런지 우주쓰레기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영화는 소름끼치게 고요합니다. 오직 주인공의 숨소리와 비명만이 스크린을 채우죠. 하긴 우주에는 공기가 거의 없어 소리가 퍼지지 않으니 올바른 고증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릴 때 스타워즈로 지구과학 배울 때는 안 그랬는데. 쾅쾅뿌슝뿌슝콰과과과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단순합니다. 우주공간에서 재난과 마주치고 힘겹게 이겨내고 지구로 돌아오는 스토리죠. 하지만 이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영화는 태어남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읽힐 수 있습니다. 에어록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는 스톤(산드라 블록 분)의 이미지는 태아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죠.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쓰이는 '줄'도 그렇습니다. 네, 탯줄이죠. 줄은 우주공간으로 튕겨져 나가 죽을 수도 있었던 스톤을 살려냄과 동시에, 막상 지구로 돌아가려는 소유즈를 옭아매 위험에 처하게 하기도 합니다. 태아는 탯줄을 통해 먹고 숨쉬지만, 태어나기 위해선 그 줄을 잘라내야 합니다. 대기권에 돌입하는 순간 보이는 수많은 파편들은 정자를 상징하고, 스톤이 빠진 호수는 양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호수에서 빠져나온 스톤은 힘겹게, 다시 두 번째 걸음마를 내딛습니다. 이 지구라는 거대한 뺑뺑이 위로 말입니다.


영화 중후반부에 환영으로 나타난 코왈스키는 말합니다. 우주가 좋지? 여긴 아무런 상처도 없으니까. 맞는 말입니다. 스톤에게 있어 지구는 어린 딸을 떠나보낸, 상처가 가득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코왈스키의 말을 뒤집어보면, 그게 삶인 거죠. 우주는 죽음의 공간이고, 인간은 오직 죽은 뒤에만 아무 상처가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죠. 선택해야 합니다. 상처를 딛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답은 역시, 보드카입니다.

 

멋진 영화입니다. 재수 때문에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못 본 게 못내 아쉽습니다. 기숙학원에서 휴가 나와서 에반게리온:파가 아니라 이걸 보는 거였는데. 참고로 그래비티는 넷플릭스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되도록 폰 말고 큰 화면으로 보세요. 그 편이 조금 더 멋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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