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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Dec 24. 2020

오랜만입니다 융 선생님

아니마(2019) 리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찍고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옹이 출연했습니다. 거기에 러닝타임은 15분. 도대체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제목은 저렇게 지어 놨는데 카를 융 선생님 이야기는 얼마 안 나올 겁니다. 이 분 개론서 초장만 간신히 읽다가 덮었거든요. 그럼에도 언급한 이유는 아니마(Anima)라는 개념이 카를 융이 제시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마, 남성에게 내재된 여성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융 정신분석학의 용어입니다.

꿈 속에 빠진 자들의 군무.

아니마(2019)는 15분짜리 단편 영화, 혹은 뮤직비디오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영상은 땅 속을 달리는 지하철에서 시작됩니다. 꾸벅꾸벅 잠에 든 승객들이 보이고, 그 와중에 슬며시 잠에서 깨는 톰 요크 옹과 한 여인이 보입니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승객들의 군무가 시작됩니다. 잠에 빠져 일사불란하게 뒤척이는 듯한 군무입니다. 지하철이 멈추고, 승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그 때 톰 옹의 눈에, 아까 그 여인이 두고 내린 가방이 하나 보이죠. 톰 옹은 그 가방을 전해주기 위해 승객의 인파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 와중에 그 인파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여인과 톰 옹 뿐입니다. 톰 옹은 개찰구에서 막히기도 하고, 거꾸로 밀려 오는 눈 감은 들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기어이 지상으로 올라와 그 여인과 만납니다. 둘은 지상의 밤거리를 함께 달리고, 춤을 춥니다. 곧 낮이 오고, 둘은 지상의 트램에 함께 올라타 영화는 끝납니다.

개찰구 장면. 오직 톰 옹만 쉽사리 통과하지 못한다.

내용을 간략히 살펴봤으니, 아니마라는 단서를 붙잡고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이어가 봅시다. 잠에 빠진 지하철의 승객들을 "꿈"에 대응시켜 봅시다. 그렇다면 지하철은 무의식의 영역을 의미하겠군요. 꿈 온갖 무의식이 얽혀 있는 공간이거든요.


왜 꿈이 무의식의 공간일까요. 일단 무의식이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심층 영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의식할 수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 무의식을 어떻게 존재한다고, 혹은 연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융의 스승인 프로이트는 '꿈'을 해답으로 내놓습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꿈 속에서 드러난다는 거죠.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선 꿈을 무의식이 드러나는 장으로 보는 겁니다.


아니마에서 이 꿈의 영역, 무의식의 영역은 지하철로 표현됩니다. 지하철은 지하, 즉 심층에 있죠. 그리고 톰 옹은 자신의 아니마를 찾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심층에서 표면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식의 방해를 받죠. 눈 감은 존재들에게 휩쓸리고, 그들을 역행하고, 부딪히기도 하죠. 하지만 이 험난한 과정 끝에 톰 옹과 아니마는 만납니다. 그리고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하죠.


닉 수재니스의 "언플래트닝"을 보면, 이상적인 대화는 둘이 추는 춤과 같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각기 다른 동작을 취하지만 그것은 다시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되 서로를 침범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습니다. 톰 옹과 아니마가 함께 추는 춤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대화죠. 조우, 대화, 조화. 남성인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적 자아와의 대면. 그리고 시간은 어느새 흘러 모든 것이 환하게 비춰지는 낮이 됩니다.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의식의 세계가 도래하죠.


둘은 트램에 올라탑니다. 트램, 그리고 지하철. 작중에서 두 탈거리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립니다. 화면의 소실점을 향해 달리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태우고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것, 아마 시간 혹은 우리의 삶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리뷰를 읽는 것보다 한 번 더 보는 게 더 좋은 영화입니다. 초반 지하철에서의 군무 씬, 거대한 석벽 위로 펼쳐지는 빛의 향연, 기울어진 흰 무대 위의 춤 등 굉장한 비주얼이 시시각각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든요. 최면에 빠뜨리는 듯한 음악도 매력적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제가 음악 방면에선 아는 게 없어서 음악에 대한 해석이 많이 미진하게 됐습니다. 뭐 어때요. 전 한 번 더 들으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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