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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Dec 30. 2020

오프닝에 속지 마세요

디스커버리(2017) 리뷰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안 통하는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죽음이죠. 산 사람은 죽어볼 수가 없고,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죽음, 혹은 사후세계란 소재는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 됩니다. 무도 말해줄 수 없어 텅 빈 공간만큼 상상으로 채워넣기 좋은 곳이 또 있을까요. 때문에 당장 사후세계를 다룬 창작물을 대보라고 해도 네다섯 가지는 델 수 있습니다. 타나토노트, 사자 형제의 모험, 신과 함께, 블리치, 코코 등등. 이번 영화 <디스커버리(2017)>도 이런 소재적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아니 어딜 가긴 하는 걸까요. 죽으면 끝일까요, 아니면 사후세계로 가는 걸까요. 해묵은 논쟁입니다. 여기서 디스커버리는 일단 전제를 깔고 갑니다. 인간이 죽으면 그의 의식이 어디론가 다른 차원으로 건너 간다 - 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깔고 가죠. 작중에선 하버 박사라는 사람이 이를 완벽히 증명한 상태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거침없이 자기 관자놀이에 총을 갈기기 시작하거든요. 죽은 뒤의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몇 백만 명이 자살을 해버리죠.

사후세계의 존재가 증명되자마자 권총자살을 해버리는 앤디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상당히 망겜이거든요. 일단 태어나면서부터 스탯이 랜덤으로 정해지는데다가 거기에 본인이 관여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초창기 메이플도 주사위 굴릴 기회는 줬었는데 말이죠. 심지어 그 스탯에 돈도 들어갑니다. 리젠되는 던전도 랜덤입니다. 누구는 비버리힐스의 3층 대저택에서 태어나지만 누구는 소말리아 반군 캠프에서 태어나죠. 거기다 랜덤 인카운터도 제멋대로라 재수 없으면 죽습니다. 심지어 세이브 로드도 안 돼요. 그런데도 동접자가 70억이 넘습니다. 왜? 대체제가 없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인생 말고 다른 게임이 있다면? 그럼 눈 딱 감고 로그아웃 해볼만 할까요? 뭐 일단 디스커버리에선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나옵니다. 망겜 버리고 구조선으로 환승 하겠다 이거죠. 그럼 여기서 당연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그럼 그 구조선(사후세계) 정확히 어떤 곳인데? 여기에 대해 하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차가 역을 떠나는 걸 봤는데 그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합니까?


어딘가로 가긴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이거죠. 그리고 작중에서 하버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연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알아내죠.


한편, 하버에게는 윌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윌은 한때 아버지 하버와 함께 사후세계 연구를 했었지만 이후 의절을 했었죠. 아버지가 연구에 미쳐서 어머니를 등한시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결혼기념일에 자살을 해버리거든요. 이에 질린 윌은 집을 나와버립니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에 윌은 아버지가 은둔해 있는 섬으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섬으로 오는 배에서 한 번 마주쳤던 아일라라는 여자가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는 것을 막죠. 그리고 그 여자를 자살로부터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연구소로 데리고 옵니다. 그 연구소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모은 공동체 역할을 겸하기도 하거든요. 대체 이 공동체는 뭘 하는 곳일까요? <미드소마>에 나오는 것 같은 컬트 집단? 혹시 이들을 대상으로 하버 박사가 생체 실험을 하는 건 아닐까요? 사후세계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요?혹시 <이벤트 호라이즌>에서 나온 것처럼 한도 끝도 없이 끔찍한 곳라면?

사후세계를 볼 수 있는 장치에 스스로의 몸을 맡긴 윌.

안타깝게도 다 틀렸습니다. 이건 그런 영화가 아니예요. 굉장히 잔잔하고 스릴 없이 진행됩니다. 중간에 병원에서 시체 훔치는 씬이 그나마 가장 스릴 있었어요. 아 그래도 저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손목 한 번 움켜쥐어주긴 하겠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템포는 슬플 정도로 잔잔합니다. 그래도 사후세계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만큼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거기에 뭐가 있냐고요?


또 다른 현실이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가장 후회하던  과거의 순간으로 가게 됩니다. 작중에선 '대체 현실'이라고 표현되죠. 하버 박사의 경우 아내가 자살하던 날 저녁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아내의 자살을 막죠. 참고로 시간 여행 같은 건 아닙니다. 다른 평행세계로 갈아탄다는 느낌이 강해요. 이걸 알게 된 하버 박사는 기겁을 하며 이 사실을 밝혀낸 기계를 파기하려 합니다. 당연하죠. 자신의 후회와 과오를 죽음으로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간다면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들도 다 자살해 버릴 테니까요. 그렇게 기계가 파기되기 직전, 주인공 윌은 사후세계를 보여주는  기계에 자신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 너머를 보게 되고, 한 가지 사실이 밝혀집니다.

아일라와 윌.

바로 영화 시작부터 윌은 이미 죽은 이후였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말이죠. 그럼 윌은 죽을 때마다 어디로 되돌아오는 걸까요? 바로 연인 아일라의 죽음 이전, 그녀와 처음으로 만났던 배로 되돌아옵니다. 이전의 생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그 배로 되돌아왔. 문제는 이 끊임없는 루프 속에서도 그는 아일라를 구해내지 못했었다는 거죠. 하지만 이번에는 구해냅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하진 못했지만, 그녀를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는데는 성공했죠. 이를 깨달은 윌은 비로소 이 배 위의 루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번에는 배 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해변에서 말입니다. 이 해변은 아일라의 후회가 배어 있는 공간이죠. 잠깐 잠든 사이 아일라가 다섯 살배기 아이를 잃은 곳거든요. 윌은 그곳에서 아일라의 아이를 구해내 아일라에게 전해주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죽음은 탈출구가 아니다,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봤자 자신이 가장 후회하던 시점의 삶으로 되돌아갈 뿐이죠. 심지어 기억도 지워지기 때문에 그 후회스러운 상황을 만족스럽게 타개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그 후회가 해소되지 않는 한 죽어서도 그 후회의 루프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삶에 충실함으로써 그 후회로부터 벗어나는 것 뿐입니다. 도망치지 말고요. 베르세르크의 가츠 형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원래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는 겁니다.


상징 얘기도 잠깐 해보죠. 영화는 후버 박사의 기차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해변에서 끝이 납니다. 기차는 정해진 레일 위로만 달립니다. 그리고 같은 구간을 오가기 때문에 계속해서 순환선을 그리죠. 반면 해변은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바다 위에는 레일이 없거든요.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겁니다. 후회의 순환에서 벗어나 가능성의 세계에 도달한 윌의 모습을 이런 배경적 장치를 통해 은유하고 있는 것이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하기 시작한다는 자극적인 오프닝 때문에 이 영화에 섣부른 기대를 가지기 쉽습니다. 어째 이 부분만 인터넷에 많이 퍼져 있더라고요. 자살에 얽힌 스릴러를 보고 싶으시면 차라리 장강명 작가의 <표백>을 추천합니다. 이 영화는 스릴러도 어드벤쳐도 아닙니다. SF라는 다대기를 조금 푼 미지근한 맑은탕에 가깝죠. 하지만 이런 기대를 내려놓고 본다면, 제법 잔잔하고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수작입니다. 그런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저는 이만 타란티노와 에드가 라이트의 매콤한 디저트를 먹으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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