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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Feb 01. 2024

부끄러움을 견딜 시기

인생을 살다 보면 남들이 나를 주목하는 시기와 내가 나 자신을 주목하는 시기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스무 살 이전에는 남들이 나를 주목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했었다. 처음 접해보는 학교라는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남들의 평가, 남들의 시선이 올바르고 객관적인 척도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객관적인 척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빨리 깨달은 똑똑한 친구들이 있었고, 나도 뒤늦게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듯도 하지만 이미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버린 지 오래.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수능. 날카로운 잣대에 오롯이 선 나 자신은 참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타인들에게 별 것 아닌 결과를 받아 든 그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오롯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남들의 평가를 제외하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롯이 남들의 평가와 점수를 위해 달려온 10년이 보잘것없는 숫자 하나로 귀결된다는 게 너무나 허무했지만 길고 긴 경쟁에도 다행스럽게 지켜온 나 자신이 있었다. 물론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발견한 내 모습은 솔직하고, 상대방에 대한 편견이 적으며, 최대한 포용하려고 애쓰는 꽤 괜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남들의 것이 아닌, 오롯한 나 자신을 좀 더 연구하고, 갈고닦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학 4년 동안 그 생각에 충실하게 살았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 읽고 싶었던 책,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 늘 가까이 지냈다. 아마도 그것이 자양분이 되었던 걸까. 신기하게도 남들의 평가를 떠나 나 자신에게 집중했더니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에게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때가 종종 생겼다. 꿈같은 시간을 마무리하고, 취직을 했다.


취직을 하고 나서도 나에 대해 늘 관심을 기울이고, 다독이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야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남들의 평가에서 자유롭게 살기로 했는데 회사에서 받는 평가와 관심은 새로운 것이어서 어느 순간, 남들의 주목에 주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학교라는 공간은 성적이라는 객관적인 수치가 있었고, 남들의 기대에 따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되는 단순한 공간이었지만  회사라는 공간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땅히 쫓을 것이 없었지만 나는 늘 쫓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재미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공허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어느새 회사생활 10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내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답답함과 공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더 발전적이고, 그럴듯한 것에 관심이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마 그런 생각 때문에 내가 늘 일관되게 관심을 가졌던 '답답함'이 내 인생의 화두였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하다. 그리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답답함이라는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답답함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의 답답함이 조금씩 가벼워진 듯하다. 답답함과 공허가 느껴지는 날이면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답답한 감정이 숨어버리고, 오히려 답답함에 이르는 실마리를 더 선명하게 재현하기 위해 거꾸로 답답함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화는 다시금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영어는 늘 부족하다. 영어가 곧 실력이고, 능력과 직결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부족한 영어실력과 함께 해야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내가 속한 조직에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런데 며칠 전, 이곳의 정세 전문가와 면담에 들어가야 할 일이 생겼다. 1년 선배가 주선하는 면담이고, 이 면담에 같이 들어가야 할 사람을 찾고 있기에 내가 들어가겠다고 했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 면담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들어갈 사람이 있었던 상황이었고, 면담에 들어간다는 것은 면담 결과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정세 전문가는 말이 빠르고, 많은 양의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오랜 기간의 방황을 마치고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남의 평가보다는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나 보다. 내가 성장하고, 좀 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1년 선배는 거의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 실력으로 내 면담 결과를 보면 나의 민낯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지만 조금 더 성장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대참패. 면담에서 핵심이 되는 이야기들을 다 놓쳐버렸고, 가끔 들렸던 조각들을 이어 붙여 어렵사리 결과를 써냈지만 아니나 다를까 거의 대부분이 날아갔다. 1년 선배이면 동기나 마찬가지이니 부끄러움은 배가되고, 예상한 부끄러움이었지만 그 부끄러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들키기 싫은 사람에게 나의 치부를 한 점 남김없이 드러낸 오늘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나의 바닥이 이 정도였구나! 올라갈 길이 너무나 멀구나. 하지만 이 처절한 부끄러움 속에서도 무거운 부끄러움을 견딜만한 튼튼한 마음이 있다는 것. 그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일기장이 있다는 것. 그것이 꽤나 큰 위안이 된다. 회사생활 15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렇게나 부끄러워야 할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에 반성하게 되지만 또 그만큼 성장하면 되니까. 며칠 전 보았던 김미경 선생님 영상도 꽤나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본인의 40대는 20%만 준비되면 실전에 뛰어들었던 시기였으며, 몸으로 부딪히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만큼 성장하게 되었다는 말. 


부끄러움의 후폭풍은 생각보다 크다.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새벽 3시 반에 눈이 떠서는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움을 최선을 다해 견디던 시기. 내가 나중에 나의 40대를 돌아보며 자랑스레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 오늘도 영어 공부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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