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올라온다고 하여 약속을 정하던 중이었다. 친구가 맥도널드에서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친정에서 저녁을 먹고 나와야 할 것 같고, 거기가 24시간 하기도 한다는 이유였다.
저녁때 맥도널드라니! 옛 기억이 솔솔 떠올랐다.
대학만 들어가면 연애를 시작할 줄 알았던 나는 1학년에 연애사업이 성사(?)되지 않고 2학년에도 마찬가지라 대학 생활이 실패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 나름대로는 남자친구를 사귀면 하고 싶었던 것들도 생각해 뒀는데 - 서로의 학교 앞에 가기. 영화 보고 커피숍 가기 등등 - 좀처럼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다 끝나갈 무렵에 겨우겨우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이제 학교 앞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던 남정네들 사이에 내 남자친구도 서 있으려나, 하고 제법 기대했었는데 집돌이 성당 오빠였던 남자친구는 익숙한 환경(=동네)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가 학교 앞으로 마중 나오는 날은 도통 오지 않았다.
그와의 연애는 내가 꿈꿔왔던 모습과는 다소 달랐지만 어쨌거나 동네에서 몇 번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어느 날 저녁 그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은 만나지 말자."
"왜?"
"그냥... 돈도 없고."
'나는 준비도 다 했는데! 돈이야 내가 내도 되는데! (실제 돌아가며 내고 있었고)'라는 생각이 들어서 돈은 내가 내겠다고 했더니 그는 맥도널드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사실 맥도널드를 별로 가보지 않아서 맥도널드가 좀 생소했다. 우리는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1,000원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남)
나는 다른 걸 더 살 수도 있었지만 그가 자존심이 상할까 봐 아이스크림만 샀다. 나는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매일 PC방 가고 담배는 피우면서 나랑 데이트할 돈은 없나? 그리고 돈이야 내가 내도 되는데 왜 약속을 취소해? 그나저나 형편이 많이 어려운가? 용돈이 부족하면 아르바이트를 할 만도 한데 아르바이트도 안 하네.'
그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생각이 복잡했다.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내가 생각한 연애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며 내 마음은 오락가락 널뛰었다.
그날 밤, 맥도널드는 참 밝았다.
맥도널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학교 앞에서 소개팅했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와 나는 우리 학교 앞 파스타 집에서 저녁을 먹고 어디를 갈지 길에 잠시 서서 이야기했다. 그가 우리 학교 지리를 잘 모를 것을 고려하여 내가 장소를 제안했다.
"맥주나 칵테일 한 잔 하실래요?"
그는 매우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술 잘하세요?"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무슨 고주망태 주당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아니, 이 사람아! 누가 부어라 마셔라 하재? 그냥 얘기하려고 가볍게 한 잔만 마시자는 거잖아. 나는 마음의 소리를 꾹 참고 말했다.
"하하... 술을 잘 마신다기보다... 술을 잘 못 마시세요?"
"네, 저는 술을 못 마셔요. 우리 저기 배스킨라빈스에 가서 아이스크림 먹죠."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 얼굴의 잡티가 적나라하게 보일 것 같았던 배스킨라빈스. 암만 생각해도 배스킨라빈스는 소개팅과는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날 밤, 배스킨라빈스도 참 밝았다.
앞에서 언급한 맥도널드 男은 훗날 알을 깨고 나와 우리 학교 앞에도 오고 낯선 장소에 소풍도 가게 되었고(봐봐, 맘먹으면 되잖아) 몇 년 후 나의 남편이 되었다. 맥도널드 시절엔 돈도 돈이지만 나가기 귀찮았던 이유가 컸으리라 유추한다.
이 두 이야기를 현 남편(구 맥도널드 男)에게 들려줬더니 자신은 불리한 기억은 까먹는다며 맥도널드에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단다. 그러더니
"그들은 그다지도 밝은 곳을 좋아했다. 캬아! 문학 작품 제목 같지 않냐?한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배출되니 나의 문학적 감성까지 폭발하는구나."라며 자아도취했다. 그리고 덧붙인 한 마디.
"자기는 어두침침한 데를 좋아하는구나?"
하아! 얄밉다.
나는 친구에게 맥주라도 마실 수 있는 다른 장소에서 보자고 했다. 훤한 맥도널드 말고 다른 곳에 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