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떨어질 만큼 춥고 손이 아릴 정도로 시린 강추위가 찾아왔다. 매년 겨울은 싫지만, 차디찬 공기는 옛 기억들을 새록새록 소환하며 추억 여행을 시켜주곤 한다.
첫 번째 추억 여행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수능 전날이다. 나는 고 2 때 학급 부회장이었는데, 그때 학급 회장과 부회장들은 수능을 보러 가는 고 3 선배들을 응원하러 가야 했다.
당시 삐딱함으로 무장했던 나는,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을 굳이 왜 응원하러 가야 하는지 의문이었고, 수능 시험 당일이 아닌 전날에 가서 진을 치고 있어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툴툴대면서도 해야 할 건 또 해야 했으므로 나는 삐딱함 대신 옷으로 무장했다. 위에는 내복에 티셔츠에 목폴라에 스웨터를 입고 목도리를 칭칭 둘렀고, 아래에는 스타킹에 바지를 입었다. 문제는 발이었다. 어그 부츠가 없던 시절이라 (내 기억으로 어그 부츠는 2004년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방영되면서 한국에 대유행하였다.) 양말을 세 겹쯤 신고 운동화를 신었더니 발이 너무 아팠다. 결국 양말은 두 겹만 신었는데 밤새 발이 시렸다.
내가 당번으로 맡은 학교에 갔더니 과연 학생회장단, 동아리 등 우리 학교 외에도 인근 학교 학생들이 많이 와 있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면 밤을 새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맞는 얘기였나 보다.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아직도 모름)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고 앉아서 같이 응원 온 친구들과 내년엔 과연 우리가 저 시험장에 들어가 시험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더럽게 추운 밤이었다.
까맣디 까만 어둠이 옅어지면서 하늘은 남색이 되고 어느새 밝아지기 시작했다.
"교문 앞으로 가!"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응원 부대들은 우다다다 교문 앞에 줄 섰다. 그렇다. 자리를 선점한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돗자리는 짐을 놓기 위한 곳이었을 뿐이었다. 교문 앞에 빽빽이 서서, 드센 애들의 플래카드와 목소리에 묻혀, 우리는 그저 박수나 칠 따름이었다. 게다가 시험을 보러 오는 이들이 사복을 입었기에 저들이 과연 우리 선배인지 우리는 알 턱이 없었고, 선배들 역시 정신없이 입장했으므로 자기네 학교 후배들의 존재를 발견했을 리 없었다. '나는 왜 추위에 이리도 약할까', '나는 왜 매사 하라는 것에 따르기보단 불만이 가득할까'라며 잠시 반성할 뻔했던 나는 '이것 봐. 다 쓸데없는 일이었지. 역시 내가 이유 없이 툴툴대지 않는다니까!'라고 툴툴대며 귀가했다.
두 번째 추억 여행은 역시나 고등학교 때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독서실에서 나온 시간이다. 내가 다니던 독서실은 시장 끝 건물에 있어 나는 시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갔는데,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 시장은 이미 문을 닫아 가로등 외엔 불빛이 많이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까만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었다. 겨울에는 다른 계절보다 별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그 당시엔 밤하늘의 별이 삭막한 내 마음을 위로해주곤 했었다. 추위가 지긋지긋하게 싫었지만, 별을 보는 순간만큼은 별이 잘 보이는 겨울이 좋았다.
밖에서 찬바람으로 볼때기를 맞을 땐 여러 기억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는데 막상 따뜻한 집에 들어오니 그 느낌이 안 난다. 게다가 첫 번째 추억 여행을 길게 쓰느라 지쳐서 더 쓰기 싫어졌다.
오늘 글이 좀 재미없는 거 같아서 흑역사 하나 투척하고 간다. 2000년 말 겨울에 남자 사람한테 고백하려다 실패한 얘기다. 사연도 구질구질하고 글도 초창기 글이라 좀 그런데 가볍게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