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지니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고백하러 가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대학 새내기 시절, 모임에서 그를 처음 봤다. 그는 그 모임의 창시자(?) 아니 운영자였다.
그 모임은 친목을 도모하는 사교 모임이었지만 사실상 술 모임이었다. 우리는 신촌이나 대학로의 대형 호프집에서 주로 만났다. 그래도 불온하게 생각하진 말자. 술만 마신 건 아니다. (노래방에서 노래도 불렀다.) 온라인 상 글로 만난 것도 인간 대 인간의 교류였으니.
그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처음엔 그가 모임의 대표라서 눈에 들어왔다. (난 어릴 적부터 반장이나 1등을 좋아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무조건 주인공만 좋아하는 병이 있었다. 주인공만 칼라로 보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흑백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재미있었다. 쇼맨십이 있는 친구라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관심이었는데 눈덩이가 뭉쳐지듯이 호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술집에서나, 노래방에서나 내 눈길은 그에게로만 갔다.
나는 이 감정을 안다. 짝사랑.
실상 나는 짝사랑 전문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쩌다 좋아하게 된 사람이 있으면 몇 달을 좋아하다가 나 자신의 감정을 꾹꾹 억눌러 정리하곤 했다.
몇 달간 그를 짝사랑하면서 한 해가 저물었고, 새해가 되고서 나는 그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새내기에 연애하고 싶다는 나만의 소박한 소망, 혹은 원대한 포부는 이미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난 바 있었고 ("그건 연애가 아니었어" 참조) 이번엔 차일 게 뻔할지라도 용감하게 한번 고백해 보고 싶었다.
모임 외에 따로 만난 적이 없는 그에게 둘이 만나자고 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아니, 내가 안 괜찮아. 나는 꼭 고백하고야 말 거야!
결국 그와 약속을 잡았다. 그의 동네까지 가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고백하려는 자는 이 정도는 해야지. 고백이 내 새해 계획이다!
즐겁게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데 그가 자꾸 자신의 사주 얘길 한다.
"내 사주에 불 화(火) 자가 네 개나 있대."
이게 뭔 소리?
"사주에 불이 많으면 사람들이 다가오다가 불에 타서 못 들어온대. 내가 사람들을 밀어내기도 하고."
아니 아니, 그런 말 하지 마. 아직 고백에 '고'자도 안 뗐는데 벌써부터 거절하려고 밑밥 깔지 마.
어려운 자리가 더 어려워졌다. 나는 술만 마셨다. 긴장한 탓에 안주도 거의 먹지 못한 채 술을 실컷 마셨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고백을 했을까?
그건 나도 모른다.
나는 그날 난생처음 필름이 끊겼다.
그의 동네에서 우리 동네까진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 무슨 연유에선지 세 시간이나 걸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내가 지하철역 의자에서 안 가겠다고 버티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 시간쯤 있었단다. 취한 자의 말이니 100% 신뢰할 순 없다. 그래도 더 취한 자는 기억조차 없으니 뭐라고 반박하겠는가? 그래도 그가 의리는 있어서 날 안 버리고 집까지 데려다줬나 보다. 다음 날, 코트에 선명하게 묻은 까만 쓰레기 눈의 흔적을 보고 내가 눈길에 넘어져 나뒹굴었구나, 유추할 뿐.
나의 첫 고백은 그렇게 실패로 끝이 났다.
교훈: 술 마시고 고백하지 말자. 맨 정신에 하자. 안 그러면 고백했는지 안 했는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