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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Feb 28. 2022

엄마와 지하철

* 이 글은 좋으니 작가님의 '엄마와 붕어빵'을 보고 생각난 글로, 좋으니 님의 따뜻한 글과는 성격이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2차 성징이 또래에 비해 다소 늦었던 나는 같은 반 애들이 때때로 양호실에 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ㅇㅇ는 왜 양호실에 갔어? 어디가 아프대?"

"응, 그냥 몸이 안 좋은가 봐."

친구들도 그렇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여자 아이들에게조차 '생리'나 '생리통'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에게 찾아온 그 신호가 나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혹시 남자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하며 살았다. '여자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남자였다.'는 희귀한 경우를 다룬 해외 뉴스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어서 그 케이스가 나일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에게도 생리가 찾아왔고 나는 내가 남자가 아님에 안도했다. 다행히도 생리통도 없이 무난하고 수월하게 세월이 흘러갔다. "두통! 치통! 생리통엔 게보린!"이란 광고 카피에 '두통과 치통은 알겠는데 대체 생리통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고통이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엔 생리통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알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땐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막연히 나는 회사와 안 어울리고 대학원과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공 학점도 그닥이었고 좋아하는 전공과목도 손에 꼽을 만큼 적었는데도 무대뽀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른 채 입학한 대학원은 고통 그 자체였다. 전공도 맘에 안 들었고 (그제야!), 여기서 참고 이겨 낸다고 해도 미래가 안 보였다.


학비를 벌기 위해 했던 과사무실 조교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훗날 회사 일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을 일도 아니었건만, 그땐 또 그게 전부인 양 일에 매몰되었다. 교수님들에게 회신을 독촉하고 행정실 선생님한테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출판사에 교재를 맡겨서 인쇄를 주문하던 일, 시간 강사 선생님들이자 선배님들의 수업 시간표를 짜면서 일일이 연락하여 양해를 구하던 일들.



날씨가 화창한 가을 어느 토요일, 학회 준비 때문에 학교에 갔다. 나는 다른 조교들과 함께 다과와 학술지를 세팅하였다. 시작 전끝나는 시간에만 할 일이 있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선생님들의 발표를 보면 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엄청난 고통이었다. 차라리 다과 세팅이나 과사무실 일이 내게 맞았다.


학술 활동이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모호한 영역이었다. 학술지를 읽어도 와닿는 내용이 하나도 없고, 발표를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미 몇 번의 크고 작은 학회에 참석해 봤지만 상황은 늘 마찬가지였다.

'연구란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무슨 주제로 논문을 써야 하나? 내가 혹시 잘못된 길로 들어온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데.'라며 자신을 괴롭혔다.


학회가 끝난 후 나는 뒷정리를 했다. 학회장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과사무실에 집어넣고 교문을 나가는데 극심한 생리통이 느껴졌다. 대학생이 되고 가끔씩 생리통을 느낀 경우는 있었지만 배와 허리가 조금 아플 뿐이었고 심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배와 허리가 아픈 것은 물론 식은땀이 나고 토할 것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고 호흡마저 곤란해지는 느낌에 한 걸음 걷다 멈추고 한 걸음 걷다 멈췄다. 길만 건너면 약국이니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횡단보도까지 걸어갈 수 없었다.


길가에 토스트 아저씨가 있었다. 트럭이었는지 리어카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항상 그 자리에서 토스트를 파는 아저씨다.

"학생, 어디 아파요? 119라도 불러 줄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숨을 몰아 쉬었다.

"괜찮아요? 얼굴이 핼쑥해요."

괜찮다고는 대답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도저히 저 8차선 도로를 건너 약국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길을 건너기는커녕 당장 한 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119 좀 불러 주세요."


토스트 아저씨가 119 구급차를 불러 주었다. 나는 길거리에 철퍼덕 앉아 있다가 머리와 몸을 쭈그려 구급차에 탔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들것에 실려서 누운 채로 구급차에 태워지는 거였지만, 그러기엔 내 정신이 온전하였다.

 

"어디로 갈까요? 선호하는 병원이 있어요?"

구급대원 아저씨는 마치 택시처럼 목적지를 물었다.

"아무 데로나요."

"독립문 근처 xx 병원 괜찮아요?"

"아무 데나 가주세요."


역시 병원에 도착해서도 나는 쭈글쭈글 걸어 들어갔다. 자세를 똑바로 펼 수 없어서 배를 움켜쥔 채 짧은 호흡으로 헉헉대면서.


진통제 링거를 맞으며 엄마에게 병원에 왔다고 전화했다. 그리고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엄마가 와 계셨다.

"엄마!"

"주야, 괜찮아?"

엄마 얼굴을 보니 눈물이 날 뻔했다.

"응, 주사 맞고 나니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이제 집에 가자."

수납을 하고 병원을 나섰다.


"엄마, 차 갖고 왔어?"

"주말에 서울 시내에 차를 어떻게 가져와? 길도 막히고 엄마 여기 길도 모르는데."

"그럼 우리 뭐 타고 가?"

"뭐 타고 가긴 뭐 타고 가? 지하철 타고 가야지."

"택시도 아니고 지하철을?"

"너 다 나았다며. 택시 타면 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택시를 타?"


아아, 우리 알뜰한 어머니는 얄짤이 없으셨다. 엄마가 야속하긴 했지만, 지하철을 타러 갔다. 진통제 링거가 효과가 좋은지 신기하게도 하나도 안 아팠다. 한두 시간 전엔 분명히 죽을 것 같았는데 엄마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해 안타까웠다. (철없는 딸이었다.)



검소한 엄마는 택시를 타본 일이 손에 꼽을 정도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시고 조금 거리가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신다. 카페에서 커피라도 사드리려 하면 카페 커피는 비싸기만 하고 맛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엄마 자신은 그렇게 아끼고 아끼며 살았지만 자식들 교육엔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딸 둘 대학에, 어학연수도 보내주고 심지어 대학원까지 보내주었다. 엄마한테 고맙고, 또한 아낄 땐 아끼고 쓸 땐 쓰는 엄마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엄마! 

그때 내 딴에는 구급차까지 타고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는데 집에 갈 땐 택시를 타고 싶었어.


어머니는 택시가 싫다고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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