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각자 일하랴, 애 키우랴 바빠서 연락은 자주 하지 못 하다가 가끔씩 생각이 나면 연락을 한다.
친구가 써줬던 편지를 사진 찍어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친구는 편지 잘 간직해줘서 고맙고 연락해준 것도 고맙다고 말했다.
"근데, 나 이제 그 이름 아니야. 이름 바꿨어."
친구의 아이가 발달이 느려서 여기저기 치료를 다니다가 개명까지 하기로 했는데 아이와 엄마가 같이 개명을 해야 좋다고 했단다. 자신도 정든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다고.
친구의 맘고생을 온전히 공감할 순 없었지만, 자식 키우는 엄마로서 오죽 하면 개명까지 했을까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친구 본인이 가장 낯설고 불편하겠지만, 나 역시도 친구가 다른 이름이 됐다고 하니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친구와 함께 했던 중국 어학연수 시절 추억이 떠올랐다.
12월 베이징 거리에 뮤지컬 포스터가 붙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
친구와 나는문화 생활을 하기로 하기 위해 큰맘을 먹고 유학생으로선 거금을 들여 뮤지컬 예매를 했다.
기숙사 로비에서 인편으로 티켓을 받았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날을 기다렸다.
12월 23일 저녁, 우리는 인민대회당으로 향했다. 당당히 표를 냈는데 오늘 표가 아니란다.
'아니, 뭔 소리? 내가 12월 23일로 예약을 잘 했는데. 오잉? 22일? 이미 지났잖아!'
인터넷으로 예약했는지, 전화로 예약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간 내가 예약을 잘못 했단다. 예약도 예약이지만 표를 열흘 전에 받았으면 한 번 확인해 봤을 만도 한데 나는 표를 받은 봉투를 뜯지도 않은 채 고이 간직하다가 공연장에 왔다. 표를 이대로 날릴 순 없겠다 싶어서 표를 받으시는 분에게 예약이 잘못 된 것 같다고 강력 항의를 했더니 어떤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우리는 공중전화에 가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과연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나 싶을 정도의 수준으로 (전화라 상대에겐 보이지 않았을) 손짓발짓을 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내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자 나보다 실력이 약간 나은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 오십보 백보) 친구가 출격했다.
"우리는 예약을 23일로 했으나, 표가 22일 걸로 왔다. 우리는 오늘 공연을 꼭 봐야 한다."
12월의 베이징은 몹시 추웠다. 항의하고 기다리느라 우리는 추위에 한참을 떨었다.
기다림 끝에 어떤 사람이 표를 들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심지어 우리가 예약한 좌석보다 좋은 좌석의 표였다. 추위 속에 표를 갖다준 그 직원이 우리에겐 구세주로 보였다. 이미 공연은 시작된 후였지만 우리는 어쨌든 다행이라며 공연장에 입장하였다.
그렇게 본 공연은?
프랑스어 노래에 중국어 자막에.
우리는 공연 내용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내용은 커녕 등장 인물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대 세트장이 거대하고 멋있었다. 노래는 웅장하고 감동적이었으며, 춤은 역동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공연 후, 나와 친구는 엄청난 감기에 걸려 크리스마스 이브 내내 기숙사 방에서 앓아 누워야 했다.
열흘 후 그 친구와 하얼빈 빙등제(얼음 조각 축제)에 가게 되었다. 멤버는 친구와 나, 친구의 친구 2명, 친구의 친구의 사촌 2명 이렇게 총 6명이었다. 친구랑 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중국어를 하나도 못 하거나 이제 막 시작한 단계였으므로 친구와 나의 역할이 막중했다.
베이징역에서 저녁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영하 20도의 날씨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들숨 날숨 때문에 코 속이 얼어서 끈적끈적하단 느낌 외에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우리는 먼저 스탈린공원에 가서 얼음 미끄럼을 타고 나서 강건너 태양도공원에서 열리는 빙설제(冰雪节, 얼음 눈 조각 축제)에 가기로 했다.
송화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버스를 타는 방법과 마차를 타고 건너는 방법. 겨울 송화강은 꽁꽁 얼어 있어서 마차로 강 위를 건널 수가 있었다.
우리는 송화강을 따라 줄지어 있는 마차 중 한 곳에 가서 가격 협상을 시도하였다. 강을 한 번 건너주는 데 50위안(그 당시 환율로 약 8천원)을 내는 것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협상을 진행하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얘기했다.
"여기 송화강엔 볼 거리가 아주 많아요. 거길 다 데려다 주고 당신들이 다 놀 때까지 기다려 줄게요. 한 명당 70위안씩만 내요."
"아뇨, 괜찮아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동물 공연도 있고, 뭐도 있고 뭐도 있고... (제대로 못 알아들음) 태양도에서 돌아올 땐 무료 버스가 있으니 그걸 타면 돼요. 한 명당 50위안으로 깎아줄게요."
나는 다시금 거절하였으나, 귀가 얇은 친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송화강 명소를 다 보고 가면 어때?"
결국 우리는 300위안을 내고 마차를 탔다. 그나마 걷는 것이 나았지, 마차에 앉으니 더 추웠다. 하얼빈의 강추위는 우리 애송이들이 감당할 추위가 아니었다.
잠시 후 마부 아저씨가 말했다.
"첫 번째 명소. 내리세요."
강바닥에 설치된 허접스러운 천막. 그곳을 들어갔더니 원래는 개 공연을 하는 곳인데 공연 준비가 안 돼서 한참 기다려야 한단다.
우리는 너무 추워서 그 공연은 포기하겠다며 마차를 다시 탔다. 그러나 마차는 비슷한 구역을 빙빙 맴도는 기분이었고, 다음 명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추위를 이기지 못 한 우리는 명소는 됐고 태양도에나 데려다 달라고 했다.
6명이 50위안(8천원)이면 되었을 것을, 300위안(4만8천원)이나 내고 만 것이다.
태양도에 도착하여 마부 아저씨는 어떤 표딱지를 건네 주었다.
"이 표가 있으면 버스 탈 때 1.5위안(240원)씩만 내면 돼요."
"무료 표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1위안씩만 내요."
"버스 무료표를 주기로 했잖아요."
"자, 그럼 6위안을 줄게요. 이건 우리 회사에서 특별히 당신들에게 주는 겁니다."
나는 태양도 공원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우리 사실 사기 당한 거야. 명소 아무 데도 안 가고. 나와서 버스까지 못 탄다 그러면 완전 사기당한 거지."
송화강에서 진을 빼고 추위에 시달렸던 우리는 눈 조각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 했다. 너무 춥고 힘들어서 눈 조각 몇 점만을 보고 공원을 나왔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서 아까 받은 표를 건넸더니 그 표는 못 쓰는 표니 버스비 1.5위안씩을 내라고 했다. 사기를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좀 쉬다가 저녁에 다시 빙등제를 보러 조린공원(兆麟公园)에 갔다. 낮에 당한 사기 사건으로 하얼빈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가졌지만 빙등제로 인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얼음 조각들, 그 속에 들어 있는 형형색색의 조명.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I야, 나는 널 생각하니 딱 이 두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좋았던 기억보다 고생했던 순간이 더 기억에 남나 봐.
이름을 바꿨다고 네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가 어쩐지 내키지가 않네. 너는 I인데.
개명한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 좋다고 하니 오늘까지만 I로 부르고 앞으론 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