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만화책을 좋아한다. 유튜브 흔한남매를 만화로 그린 흔한남매 시리즈, 곤충을 관찰하는 유튜브를 만화로 그린 에그박사 시리즈, 남동윤 작가님의 귀신 선생님 시리즈 등등.
남동윤, 귀신 선생님 시리즈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나에게 읽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고, 나도 아이들이 관심 갖는 컨텐츠는 티비 프로그램이든 책이든 한 번은 꼭 보려고 한다.
"만화책 보기 시작하면 절대 줄글책을 안 봐요."
이런 말을 들으면 때론 위기 의식이 느껴져서 아이들이 보고 있는 만화책을 빼앗고 책을 억지로 안겨주고픈 유혹도 가끔은 들지만, 그렇다고 우리 애들이 일반 줄글책을 아예 안 보는 건 또 아니어서 (사실 잘 안 본다)나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애들이 만화책을 읽을 때만큼은 깔깔 웃기도 하고 조용히 집중도 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니 어쩌겠나. 상상력이나 유머를 키워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만화도 장점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수밖에.
아이들과 서점을 방문하면 책을 한두 권씩 사준다. 유치원생 둘째는 백희나 작가님의 동화를 좋아해서 알사탕, 이상한 엄마, 장수탕 선녀님 등을 한 권씩 골라 샀고, 초3 첫째는 앞서 말한 만화책 신간이 나올 때마다 쓸어 담아 샀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서점에서 어린이과학동아 잡지를 펴보더니 그 책을 사달라고 했다. 내심 만화책만 고르던 아이가 못마땅하던 차에 나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어린이과학동아를 사주었다.
첫째는 집에 와서 어과동(어린이과학동아 줄임말)을 한참 집중하여 보더니 다음 편도 사고 싶단다. 나는 내친 김에 어과동 1년 구독을 신청하였다.
한 달에 두 번씩 어과동은 차곡차곡 도착하였으나, 그토록 집중해서 보던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이는 보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이런 걸로 애한테 압박을 주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두어 달이 흘렀다.
"엄마, 어수동(어린이수학동아)도 정기구독해 주세요."
이 말에 그동안 억누르던 본심이 터지고야 말았다.
"야, 어과동도 안 보면서 무슨 어수동이야? 1년 구독하려면 22만원이 넘게 들어. 그게 얼마나 큰 돈인 줄 알아? 어과동 왔던 거 봤어?"
오늘 저녁 웬일인지 아이가 어과동 9월~12월 8권을 쌓아놓고 1시간 반을 미동도 없이 읽었다. 숙제 하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래, 좋아하는 거 파고드는 게 더 중요한 가치겠지. 당장 영어 수학 숙제가 뭣이 중헌디. 우리 애가 과학자가 되려나.'란 생각을 했다.
10시가 되어 졸려서 숙제를 못 하겠다는 아이의 말에
"할 수 없지. 오늘은 일단 자고, 그치만 숙제도 중요하니 내일 꼭 하자. 어과동 잘 읽었어? 그렇게 재미있었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하는 말.
"네, 족집게처럼 만화만 쏙쏙 빼서 봤죠."
만화에 빠져 있는 아이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만화책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어른이 하지 말란 건 절대 안 하는 융통성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만화책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릴 때 학교에서 벌어지던 만화책으로 인한 소란이 싫었다.
그 당시 학교에 만화책을 가져오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 아이들 중 몇 명은 꼭 만화책을 들고 왔고 아이들은 만화책을 돌려 봤다. 어쩌다 소지품 검사를 하는 날이면 만화책 가져온 애들은 만화책을 압수당하고 때론 맞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아니, 쟤네들은 가져오지 말라는데 왜 꼭 굳이 만화책을 가져와서 난리인가?' 하는 마음과 '선생님들도 그렇지. 만화책이 뭐가 그리 해롭다고 저렇게까지 못 빼앗아서 난리인가?' 하는 마음이 상충하여 괴로웠다.
내가 처음으로 만화책을 접한 것은 고1 때였다.
그 당시 아빠는 사고를 당해 입원을 한 상태였고 엄마도 아빠 간병으로 병원에 계셨다. 감사하게도 근처에 사시는 이모가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 봐주시고 끼니도 챙겨주셨지만 저녁부터 밤까진 동생과 나 둘 뿐이었다.
만화책을 안 보던 내가 어떤 계기로 만화책을 접하게 됐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처음으로 보게 된 만화책이 황미나 작가님의 레드문이었다. 동생과 나는 처음으로 얻은 자유를 만끽하며 며칠 밤을 새다시피하며 레드문을 봤다. 대작 레드문을 보며 어찌나 울었는지. 레드문에 나오는 '사다드'라는 남자 용사(?)에 반해서 동생은 지갑에 사다드 그림을 넣고 다니고 나는 첫사랑이 사다드라고 말할 정도였다. 뭐, 지금은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만 사다드란 이름만 들으면 아직도 애틋함이 남아 있다.
황미나, 레드문 사다드 (이미지 출처: 삐까번쩍 jjinbbang008님 블로그)
그 다음으로 빠졌던 만화는 천계영 작가님의 오디션과 언플러그드보이였다. 역시나 지금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걸릴 걸 각오하고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몰래몰래 보던 만화였다. 해맑은 남자 주인공 현겸이 내 남자친구인 양 상상하며 얼굴이 붉어지던 시절이었다.
천계영, 언플러그드 보이 (이미지 출처: 네이버 돌총무 claygogo님 블로그)
집 근처 비디오/책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뻔질나게 빌려 저녁 시간을 불태웠던 자매의 일탈은 시험 성적이 나오고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어서 시험 전날만큼은 만화책을 보지 않았으나, 내 동생은 시험 전날까지 시원하게 만화책을 보느라 시험마저 시원하게 말아 먹었던 것이다.
그때 이후 내가 만화책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르고 하다가 겁에 질렸는지, 지쳐 나가 떨어졌는지. 만화책을 순수하게 즐겼다기보다 일탈의 하나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은만화책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즐기고 훗날 온전한 추억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남편은 어릴 적 삼국지 만화를 참 좋아했다고 한다. 본인의 추억을 공유하고자 우리아이들에게 삼국지 만화를 사주었으나 애들이 거들떠도 안 봐서 상처 받았다는 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