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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Dec 03. 2021

사기의 추억

여행에선 사기도 추억이 된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선호하는 마스크가 있어서 꼭 그것만 쓴다. 코로나 초창기에는 아이들이 자기 얼굴에 맞는 마스크를 찾지 못 해 마스크 유목민처럼 이 브랜드, 저 브랜드를 써보다가 결국 둘이 각자 선호하는 마스크로 정착했다. 얼마 전에 둘째가 쓰는 마스크가 거의 떨어졌길래 인터넷으로 구매하려고 검색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파는 곳이 별로 없었다. 마스크가 당장이라도 똑 떨어지면 안 되므로 25,000원 짜리를 일단 주문했다. 얼핏 '10개'란 글자가 보이긴 했지만, 설마 달랑 10장만 오겠나 싶었다. 바쁜 와중에 검색하느라 꼼꼼이 볼 시간도 없었다.


퇴근하고 오니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일단 졸려 하는 둘째를 먼저 재우고서 택배를 열어봤더니 그 10은 정말로 낱개 10장이었다! 지금이 코로나 초창기처럼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시기도 아닌데 한 장에 2,500원이라니!

"이거 완전 사기네."

첫째 앞에서 나도 모르게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 왜? 왜 사기야?"

"아니, 마스크가 너무 비싸서. 엄마가 잘못 주문했나?"

찬찬히 다시 검색을 해보니 그 새 판매처가 더 줄어서 45,000원 짜리를 판매하는 한 곳밖에 없었고 그것마저 몇 장인지도 표기해 놓지 않았다. 아마도 이 종류가 단종되었거나 수급이 안 되는 상태인가 보다.


"엄마, 사기 맞아요? 사기 당한 거예요?"

"아니. 뭐 사기라고 볼 순 없지. 엄마가 잘못 산 거지."

"엄마, 제 친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적이 있대요. 근데 보이스피싱이 뭐예요?"

"보이스피싱은 전화를 걸어서 사람을 속여서 돈을 보내도록 하는 거야. 갑자기 엄마한테 누가 건이가 다쳤는데 빨리 병원비 내야 하니까 돈 보내라고 하면 엄마가 급해서 보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돈 받아놓고 연락이 안 돼버리면 그런 게 보이스피싱인 거야."

"돈을 어디다 보내요? 연락은 또 왜 안 되고요?"

"전화도 못 끊게 하고 막 다급한 상황을 만들면 멀쩡한 사람도 급해져서 당한다고 하더라."

"아, 그래요? 엄마, 엄마는 사기당해 본 적 있어요?"

"있지."

"얘기해 주세요. 엄마 얘기 듣고 잘래요. 이야기 쉼터!"




"엄마가 대학생 때 이모랑 유럽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 스위스에는 설경을 볼 수 있는 산이 있는데, 건이, 설경이 뭔지 알아?"

"몰라요."

"눈 설, 경치 경. 눈이 쌓인 풍경이란 뜻이야. 아무튼 '융프라우'라는 산에 올라가는 산악열차가 있어. 그거 타려고 매표소에서 줄 서 있는데 어떤 한국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가 표를 싸게 팔겠다는 거야. 표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말했더니 그 표는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표라서 괜찮대. 엄마랑 이모는 돈이 별로 없으니까 싸게 살 수 있어 잘 됐다며 그 표를 샀거든. 그 표를 들고 열차를 타러 갔더니 이미 사용한 티켓이라고 표를 사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매표소에 가서 표를 샀지."

"그 사람들 나쁘다."

"나쁘지! 그 사람들도 사기를 당해서 다시 사기를 친 건지, 아니면 돈이 부족해서 사기를 친 건지 몰라도 너무 했어."

  

같은 배낭여행객 신세면 돈이 없는 걸 뻔히 알 텐데 어수룩해 보이는 나와 동생을 타깃으로 삼아 사기를 치다니, 게다가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악용한 것이라 더욱 괘씸했다. 그 사람들은 그러고도 남은 일정을 과연 맘 편하고 즐겁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스위스에서는 그 일을 시작으로 이상하게도 일이 많이 꼬였다. 우리는 유로패스라는 기차표를 끊고 가서 국가 간 또는 도시 간을 이동할 때 기차를 이용했다. 스위스에서 도시 간 이동하는 기차가 곧 출발한다고 하여 서둘러 기차를 탔다. 지정석은 없다고 하여 아무 자리에 앉았는데 한 40분이 지나자 역무원이 와서 티켓 검사를 했다. 티켓을 보여줬더니 이 티켓은 2등석 표이고 이 열차 칸은 1등석이므로 차액을 내란다. 한 시간만 탑승하는 여정이라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인데 벌금을 내라니. 몰랐으니 이제라도 옆 칸으로 옮기겠다고 해도 스위스 역무원은 얄짤 없었다. 결국 우린 없는 주머니를 털어 벌금을 냈다. 사기를 당한 직후라 타격이 더 컸다.   

스위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 저녁을 먹으러 간 퐁듀집에서조차 심한 바가지를 쓰며 '사기, 벌금, 바가지'라는 스위스 악몽 3종 세트가 완성되었다.




좀 웃긴 사기도 있었다.

동생과 대만 여행을 갔을 때다. 호텔에서만 묵어보다가 이번엔 유스호스텔이란 곳에서 묵어보자, 싶어서 유스호스텔을 예약하고 갔다.

타이베이(臺北) 기차역 근처 쇼핑몰 안에 위치한 곳이었다. 가이드북을 들고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유스호스텔이 있다는 쇼핑몰 몇 층을 올라가서 돌아봐도 유스호스텔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일하는 청소 직원에게 유스호스텔 위치를 물어보니 그녀는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녀가 안내해 준 곳은 리셉션 데스크가 아니라 어떤 방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방에 안내하고 가버렸다.

그 방은 얼핏 보면 여느 유스호스텔처럼 2층 침대 몇 대가 있긴 한데 뭔가 수상쩍었다. 침구류가 잘 정리된 것도 아니고 구석엔 각종 청소도구가 있고 어떤 침대에는 침대보도 쌓여 있었다. 그 곳은 방이라기보다 창고인 듯했다.

나와 동생은 유스호스텔에 묵어본 적이 없어서 유스호스텔이란 데는 원래 이런 덴가 보다 했지만 방을 구석구석 뜯어볼 수록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기 너무 이상하지 않아? 기다리면 다른 손님이 오나?"

"자기 일하면서 쉬는 방에다 우릴 안내해 줬나? 여기 창고 같지 않아?"

우린 디지털 카메라로 이 방을 고발하는 르포 형식의 영상을 촬영했다.

(후에 디카를 잃어버리게 되어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여기 너무 이상한 거 맞는데, 일단 나가서 저녁 먹고 오자. 여기서 잠만 잘 거니까 오늘은 대강 자고 내일 좀 알아보자."

그 이상한 방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아무래도 여기서 남은 이틀을 더 묵을 순 없겠다 싶어서 짐을 싸고 나왔다.

"3박 하겠다고 해놓고 1박만 하고 나가도 되나?"

"빨리 도망 가자."

우린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캐리어를 끌고 후다닥 그 방에서 나왔다. 나와서 보니 여행객들이 캐리어를 끌고 어느 곳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 유스호스텔이 저긴가 봐! 사람들 저기로 캐리어 끌고 가는데?"

"어, 진짜. 언니, 우리도 따라가 보자."

그 사람들을 따라가 보니 그 곳이 진정 정상적인 유스호스텔이었다!

리셉션도 있고 방도 여러 개 있고 다른 숙박객도 있는 이런 정상적인 숙소를 지척에 두고 창고에서 잤다니.   


대만 여행은 타이베이 유스호스텔 사기 사건으로 시작했지만 우호적인 사람들 덕분에 즐거웠다. 타이베이의 어느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보고 중국어 잘 한다며, 내 동생은 예쁘다며 밥값을 내주었고, 타이중(臺中)과 타이난(臺南)에서는 대학생들 혹은 젊은이들에게 야시장 길을 물어보니 야시장까지 안내해 준 것도 모자라 또 밥을 사주었다. 꼭 밥을 사줘서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길도 친절하게 잘 알려주고 우호적으로 대해주어 좋았다.


대만 여행의 마지막 도시 가오슝(高雄)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나는 타이중 기차역 벤치에 핸드백을 놓고 그대로 기차를 타는 바람에 졸지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기차를 타자마자 핸드백을 놓고 온 것을 인지하여 역무원에게 연락해 달라 했으나 그 2~3분 사이에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다. 여권, 비행기 페이퍼 티켓 (e-티켓이 아니던 시절이었다.), 돈, 디카가 들어있는 핸드백을 통째로 잃어버렸으니 가오슝에선 마음이 무거웠다. (다행히 여비를 한 명이 다 갖고 있진 않아서 동생 수중엔 돈이 약간 남아 있었다.)

내 마음엔 먹구름이 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오슝 날씨는 화창하고 너무나 좋았다. 겨울 대만은 습하고 비가 많이 내려서 앞서 갔던 세 도시들에선 계속 흐리거나 비가 왔는데, 가오슝만은 햇살이 쨍 했다.  

경찰서에 가서 분실 신고를 하고, 영사관에 가서 임시 여행증명서를 받고 여행사에 가서 비행기 티켓을 재발급 받았다. 경찰이 소개해준 한국 교민 대표님이 패닉에 빠진 우리를 많이 도와 주셨는데 이 자릴 빌어 감사를 표한다.  




여행에서 당한 사기는 지나고 보니 추억이 되었다.

물론 사기 당한 금액이 크지 않았으므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이리라.

빨리 다시 여기저기 여행하며 에피소드를 쌓아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우리 둘째 마스크는 어떻게 하지?

빨리 맘에 드는 다른 마스크를 찾아야 할 텐데...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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