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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 diary Apr 11. 2023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영점조절의 시간들


몇 년 전부터였는지 햇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꽤 오랜 시간부터 나는 번아웃과 싸우고 있다. 

싸웠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다 놓아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감정의 상태였던 적이 많았음에도 그 '무언가'에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 이를 앙다문 채로 버티었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애써 못 본척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똑 부러지게 대답도 못할 거면서 스스로 '힘에 부치는' 나의 상태를 인정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번아웃이 왔으니 멈추는 때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의 힘듬은 누구나 다 겪는 건 아닐까? 

나의 어려움은 정신력으로 잘 버티어내어 보자! 

나라면 잘 돌파할 수 있어! 

이렇게 참고 견디면 다 지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꾹꾹 참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냈다. 어리석게도 나의 어지러운 마음들은 아무런 쉼이나 액션 없이도 자연스레 지나가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힘들면 한 템포 쉬어갔어야 하는데, 멈추는 게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지금 보니 스스로 동굴을 더 파고 들어간 꼴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참고 인내하면 스리슬쩍 지나갈 줄 알았던 나의 어려운 감정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저히 내가 손쓸 수 없을 정도의 우울한 감정과 무너진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고, 그제야 난 비로소 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기간 중에 만난 책이 바로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이다.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제일 처음 에디터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일에 관한 책입니다. 일을 잘하는 법이 아니라. 일을 멈추는 법을 담았습니다. 이 책은 열정에 관한 책입니다.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그 불이 꺼진(burn out) 후 다시 일어서기 위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을 멈추는 법'을 담았다니,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이미 난, 이 책을 통해 내 마음방향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짧게 이야기하자면 이 에세이 모음집은, 만나야 할 때 만났어야 했던, 읽어야 할 때 읽었어야 했던, 운명 같던 나의 마음 공감 지침서가 되어주었다. 한줄한줄 읽을 때마다 마음으로 울면서 글을 읽었고, 한 장,  두 장, 한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나만 그런 거 아니었구나' '다들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공감하며, 위로의 마음을 작가의 글로서 건네받았다. 


'일을 잠시 멈춤'을 결심하는 건 개인적으로 정말 힘든 일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과연 다시 일터로 돌아올 수 있을까? (=과연 다시 일이 하고 싶을까?) 스스로의 자문에서 시작된 걱정과 염려였다. 너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일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아지다 보니,  내가 사랑했던 나의 직업과 일을 도무지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멈추는 순간 나는 도태될 것이라는 무서움도 더해졌고, 또한 갑자기 긴 휴식을 떠난다고 하면 회사에서의 나의 입지가 어떻게 될는지도 의문이었다. 지금껏 잘 다독이며 쌓아온 나의 길을 나 스스로 망치는 꼴이 되어버릴까 봐 겁도 많이 났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겨울이었고 이 추운 겨울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 이 책의 한 구절처럼, 어떤 방향이든 내겐 시간이 필요했다. 


영점조절이 필요한 시간 = 갭이어. 
영점조절은 주로 사격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와 내 현재 위치 간의 미세한 조절을 말한다. (p.25)


개인적으로도 Gap year(갭이어)에 대한 고민을 엄청 하고 있었던 때라, 작가를 포함한 인터뷰이(interviewee)들이  '쉼'을 택하게 되는 과정과 고민의 초점들이 정말 한자도 빠짐없이 공감이 갔다. 나 또한 심리상담사와 상담을 통해 나의 마음상태를 1주일에 한 번씩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던 터라, 상담사님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책에서 마치 내게 마음 챙김을 '복습'하라는 듯이 반복되며 언급될 때면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만나야 할 때 만났어야 했던 책'이라 표현했는데, 아마도 어렵고 힘든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각자의 방식으로 진솔하게 엮여 있어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울림의 크기가 더 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치열했던 영점조절 기록들이 길을 잃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방향 지침서이자 응원서 같은 책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갭이어를 가져야 할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할 정도라면 갭이어를 추천하고 싶어요. 갭이어를 가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고민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어떤 모멘텀이라고 생각해요. 그 마음을 살필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아요. (p.56)
사람마다 삶의 속도가 다르듯이 필요한 쉼의 정도나, 원하는 쉼의 형태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p.80)
번아웃이 오면 삶의 기준과 방향이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에 더욱 휘청거리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에너지가 생길 때마다 선명도를 높여야 했던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p.96)

* 나를 정말로 즐겁게 했던 일의 순간은 무엇이었나?
* 나를 가장 가슴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어떤 삶의 모습으로 일하고, 또 살고 싶은가?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불안과 자책으로 주저앉아 있을 게 아니라, 내가 다시 힘을 내어 달릴 수 있는 삶의 목표를 업데이트하는 일이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답은 오직 내 안에 있다. (p.97)
경력이 쌓이면서 실수와 실패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다 보니 넘어지면 더 크게 다쳤다. 다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많이 넘어져본 사람의 경쟁력이자 자랑은 더 이상 안 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잘 넘어지는 기술, 넘어져도 금방 털고 다시 일어나는 회복탄력성이었다. (p.112)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한다는 마음에는 그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늘 함께 붙어 있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 그런데 잘 해낸 경험이 쌓일수록, 일을 잘 해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순수하게 누리는 마음을 압도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급기야는 잘 해내고자 하는 부담감이 좋아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하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p.115)
몰두해서 하는 일에서 조금 벗어나야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달리고 있을 때는, 트랙 위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일에서 조금 떨어져야만 나 자신, 나의 일하는 모습, 그리고 내가 일에서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p.121 / 150)
평생의 커리어라는 긴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완주해 내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길을 헤매더라도,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더라도. 여하튼 무사히 끝까지 완주하는 것.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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