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선 이어폰에 의존적인 인간이라는 걸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컸던 건 직장에서의 불편함이었다. 직장에서 각을 잡고 일을 하려면 에어팟을 끼고 노동요부터 재생하는 게 루틴이었는데, 이게 무너지니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키보드 소리, 전화벨 소리, 전화 통화소리, 회의 소리. 사무실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음의 본질은 소리의 높낮이나 크기, 불규칙성이 아니라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었다. 원치 않는, 그렇다고 안 들을 수도 없는 사무실의 풍성한 소리 사이에서 전에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냥 하얀 콩나물 대가리가 되어버린 에어팟과 좀 스마트한 시계가 되어버린 스마트폰을 나란히 놓고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소음만이 아니었다. 무료함 때문에도 괴로웠다. 출근길과 퇴근길에는 날씨에 맞는 음악을 들어야 했다. 운동을 할 때에는 비트가 빠른 음악을 들으며 더딘 걸음을 한 번 더 디디곤 했다. 혼밥 할 때는 짤막한 유튜브 영상을 봐야 했고, 서울행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왕복하면서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었다. 블루투스가 끊기고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자, 갑작스러운 고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소음과 무료함을 피하기 위해서 무선 이어폰이 신체의 확장인 것처럼 끼고 다녔고, 그게 없어지니까 신체의 일부를 잃은 것처럼 불안했다.
그 때라도 휴대폰을 고치거나 새로 사지 않았던 건, 불안감을 느낄 정도면 그동안 중독이 심각했던 거 아닌가 싶어서였다. 스마트폰을 쓴 지 10년, 유튜브나 OTT 스트리밍을 사용한 지는 3년, 무선 이어폰은 2년. 그 전에는 이렇게까지 의존적이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이것들이 없으면 불안할 지경이 되었는지 놀랐다. 이번 기회에 무선 이어폰과 스트리밍 어플들로부터 자유로워져 보자고 다짐했다.
반등은 의외의 순간에 찾아왔다. 근 한 달간은 비가 자주 왔다. 그날은 특히 대차게 비가 내렸다. 평소보다 보폭을 줄이고 출근하는 길에 그동안은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려왔다. 시작은 빗소리였다. 빗줄기가 굵은 만큼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제법 묵직했다. 버스와 승용차들이 높낮이가 다른 경적음을 울리고, 교통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무언가를 재촉했다. 그 찰박찰박한 분주함이 고르게 울리며 퍼지는 느낌이 좋았다. 바닥이 덜 젖은 길에 들어서며 올려다보았더니 가로수가 유난히 빼곡해서 피우로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두꺼운 잎사귀에 빗방울이 모두 걸러져서 우산을 옆으로 들어도 비에 젖지 않았다. 새삼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빗소리를 유독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는 나를 어려워하는 20대 직원 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계급 차이는 나고 심지어 서로 존대하는 이 관계를 어려워했다. 우리 사무실은 유독 잡음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안 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의외였다. 자기들도 무선 이어폰을 끼고 일하고 싶지만 그럴 짬이 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무선 이어폰을 낀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의 모니터를 자꾸 들여다보는 계장님의 발자국 소리, 상사와 선임이 부르는 소리, 부재중인 사람의 자리에서 울려대는 전화 벨소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살펴보니 사무실에는 누구에게 명확히 속해있지 않은 일들이 꽤 많았다. 전화뿐만이 아니라, 기자들이 찾아왔을 때나 다른 부서 직원, 물품이 배송되었을 때, 먼저 움직이기 위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분명 초임 때는 나도 저랬던 것 같은데, 10년 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한동안 전화도 당겨 받고 일을 좀 거들어 주었다. 그렇게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침에 출근했는데 책상에 음료가 한 잔 올려져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악필로 "요새 커피 안 드신다고 했죠. 캐모마일은 카페인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달리기를 할 때는 바람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알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귓불을 스치면 초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진다. 매일 밤 뛰는 길에는 개구리가 꽤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공간을 가득 채울 기세로 심술을 부리며 우는 그 소리는 풀냄새와 잘 어울린다. 고막을 분기점으로 양쪽에 후각과 청각이 가득 차면 그만큼 빼곡하게 여름을 느낄 수 있다. 책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서울을 가는 길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이북리더기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면 꽤 성취감이 든다. 밥을 먹을 때도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더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먹게 된다.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의 반대말은 다양성인 것 같다. 살아가며 점점 익숙한 것을 반복하고, 낯선 것을 두려워하게 될텐데. 그렇게 경험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바이탈 사인의 진폭이 줄어들다가 하나의 선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찾고, 예민함의 날을 세우고,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 더 느리게 죽어가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 블루투스가 없는 한 달간, 필요한 소음과 필요한 무료함의 가운데서 안티에이징한 덕분에 외쳐본다. 열쩡. 열쩡. 열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