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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16. 2021

속죄

아버지는 4월에 돌아가셨다. 해마다 아버지의 기일에는 날씨가 좋았는데, 올해는 특히나 어느 때보다 봄이 선명했다. 아버지를 모신 추모공원은 광주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어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굽이굽이 들어가야했다. 공원 입구에서 도로 건너로 담양이 보이는 그야말로 시 경계였다. 거기까지 운행하는 유일한 버스는 518 묘역을 지난다고 해서 518번이라고 노선번호가 붙여졌다. 묘역이 보이기 시작하면 종점인 추모공원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는데, 거기서부터는 눈닿는 곳마다 꽃밭이었다. 너른 공동묘지에 헌화된 꽃다발과 들판의 꽃무더기들이 뒤섞여 비현실적인 장소로 가는 초입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발인 날 운구 버스 안에서 친척어른이 넋두리같은 혼잣말을 했던 곳도 이 근처였다. 추위를 많이 타던 사람이 날 좋은 때에 가서 다행히라던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그 곳의 풍경은 따스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혼자서 다시 아버지를 찾았을 때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장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납골당에 들어서면 대리석 바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하고 무력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어느 쪽을 바라보아도 납골함들이 벽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차마 손을 대보지는 못했지만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한 칸의 크기가 가로 세로 한 뼘 남짓 되어보였다. 비좁은 공간마다 한 칸에 한 분씩. 그 농밀한 죽음을 봄볕도 뚫고 들어오지 못해서 실내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벌써 다섯번 째 방문이니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납골함들을 볼 때마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들었던 화학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람을 불로 태우면 타고 남은 화합물의 가치는 천 원쯤 한다던 말이.



아버지는 아래서부터 여섯 번째 줄, 어머니의 시선 높이에 계신다. 적당한 높이에 아버지의 자리가 배정된 것을 보고 어머니는 아파트의 로열층을 분양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평생 속만 썩인 사람이 뭐가 예뻐서 그렇게 챙기냐는 타박에도 어머니는 그래도 너희 아버지가 본성은 선한 사람이었다고 감싸주셨다. 얄밉게도 사진 속의 그는 정말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다. 오십이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남기겠다고 낡은 정장을 꺼내 입던 그는 정말로 자신의 천명을 알고 있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늦지 않게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먼저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미안하긴 했던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해 줄리 없는 당신은 예의 그 웃음만 지을 뿐, 그때의 모습에서 더 이상 나이 들지 못한다.



젊었을 적 아버지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책임감과 일머리가 있어서 어디서나 두루 인정받았다. 친척들 사이에서나 회사에서,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으로 통했다. 외향적이지는 않았지만 깊게 사귀는 친구들과 자주 교류했다. 손재주가 좋아서 못 고치는 게 없었고, 낚시를 특히 잘했다. 강을 거슬러 가며 투망을 펼치던 아버지의 등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외모도 뛰어나셨다. 친구들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고, 아버지가 정말 미남이시라며 감탄했다. 58년생 개띠이신데 키가 180cm 셨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훤칠하셨던 게 분명했다.



그의 인생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받고 이직하게 되었던 그는 옮길 회사의 동료들과 첫 만남을 가진 날 거나하게 취했다. 술잔이 분주하게 돌아갔고, 주인공인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운전대를 잡은 게 화근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갓길에 부딪혀 크게 다쳤다. 차가 완파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오른쪽 무릎 슬개골이 산산조각 나고, 허벅지 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큰 부상을 입은 그에게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것이라고. 신이 돕는다면 걸을 수는 있을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좌절하지 않았다. 매일 목발을 짚고 5km 정도 되는 강변길을 걷고, 재활운동을 했다. 그렇게 독하게 재활한 덕분에 1년이 지나서는 천천히 뛸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됐다. 의사 선생님은 기적이라고, 환자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했다.



재기를 꿈꾸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 가족들끼리도 함께 놀러 다니던 친한 친구였다. 다단계와 빚보증, 복잡한 송사에 휘말리면서 지쳐가던 아버지는 그때부터 주저앉았다. 한창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야 할 마흔 즈음부터 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생계를 꾸리는 건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 되었고, 기울어가는 가세는 가족이 함께 감당해야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집안일을 챙기는 것도 아니었다. 온종일 골방에 누워있기만 했다. 학교를 갈 때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돌아누워있던 모습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액자 속의 사람처럼 가족들과 멀어져 갔고, 집안 분위기는 갈수록 어두워졌다. 그리고 술. 아버지는 그놈의 술을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양 끼고 살았다. 가족도 친구도 해줄 수 없는 위로를 술에게서는 받는 듯했다.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시련을 안겨준 게 바로 그 술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 집이 이렇게 꼬였는 줄 본인이 가장 잘 알면서 그 술 하나를 끊지 못하는 게 한심스러웠다.



게다가 그때부터 아버지에게는 몹쓸 술버릇이 생겼다. 맨 정신에 조용하던 사람이 술만 들어가면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점점 심해지는 괴롭힘이 마침내 도를 넘어섰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를 벽으로 밀쳤다. 아버지의 양손을 제압하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놓아주겠다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힘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오랜 투병과 음주에 약해진 몸으로는 어려운 일이었고, 몇 번 호통을 하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상황은 어머니의 만류로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아버지와 나는 간단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 대학에 합격하고서야 아버지와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조그마한 술상에 단출한 안주를 놓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아버지는 나름 용기를 내셨던 것이었겠지만, 나는 좋은 대학에 합격하니까 이제야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 같아서 못마땅했다. 취기가 오른 아버지는 자신도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며 인생이 녹록지 않다고 한탄을 시작했다. 당신이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를 여읜 이야기. 섬에서 홀로 광주에 올라와 고생했던 시간들. 친구의 배신. 교통사고. 내가 성인이 되길 기다렸다는 듯이 긴 이야기를 토해냈다. 나는 눈을 마주 보기 민망해져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게 되었다.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맑은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고, 얼굴 곳곳의 주름이 거칠고 깊었다. 팔 다리가 모두 얇아져 있었는데, 허벅지는 대충 보아도 양쪽의 두께가 확연히 차이 났다. 사고 이후로 다친 다리에는 좀처럼 근육이 붙지 않는다고 했다. 안쓰러운 사람. 이렇게 밖에 미안함을 표현할 수 없는 딱한 사람. 무겁고 뜨거운 기운이 울대를 치고 올라오려하는 게 느껴져서 급하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는 이해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긴 얘기를 마치고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심드렁한 반응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용서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도 않고 먼저 용서하는 건 불공평했다. 그에게서 용서해달라는 말을 꼭 들어야만 했다. 나는 그래야만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로 그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고, 해가 거듭할수록 점점 야위어 갔다.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방학은 중환자실에 입원한 그의 수발을 들면서 보냈다. 간이 상한 그는 간성혼수를 자주 겪었고, 그럴 때면 나는 중환자 보호자실에서 졸다가 불려나가서 관장을 해 드려야 했다. 중환자실은 언제 들어가도 새벽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태어날 때처럼 타인의 보살핌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들이 줄지어 누워있었다. 그 사이에서 아버지는 뼈와 거죽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불안한 숨을 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얼굴을 들이밀어도 눈동자에는 초점이 맺히지 않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번에 회복되더라도 길어야 몇 년 내에 돌아가실 거라고 했다. 이번에는 기적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조급해졌다. 자식은 부모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강력한 정언명령은 평생 나를 괴롭혔다. 말뚝처럼 박힌 그 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부정해왔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을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모나게 굴다가 돌아가시면 후회한다는, 먼저 부모님을 보냈던 사람들의 충고까지 더해지면서 부담은 끈적하게 밑바닥을 잠식해갔다. 그렇다고 속시원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와 화해하리라 굳은 맘을 먹었지만 중환자실까지 갔던 사람이 조금 회복하면 다시 술을 찾고, 또다시 입원하고 또 퇴원하고, 그렇게 시들어가기만 하는 걸 보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고, 장례식장에 도착해서는 그대로 상주 자리에 앉아서 손님들을 맞았다. 걱정했던 대로 눈물은 나지 않았다. 먼 친척과 일면식도 없는 아버지의 동창들이 와서 통곡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울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며 걱정을 해주었는데, 이상하게 슬프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다들 잠든 새벽 시간에도 잠이 오지 않아 빈소에 앉아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살아계실 적에는 존경할 만한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하더니, 돌아가시고서도 울어줄 만한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하는거냐고 원망을 했다.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늘어놓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끝내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은 염을 마치고 입관하는 순간부터 터져나왔다. 꾸준히 나약해지다가 결국 숨결이 꺼져버린 아버지의 시신이 방금 막 관 속에 안치되었고, 이제는 불길 속으로 들어갈 차례만 남았다. 그에게도 한 때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젊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끝을 맞이할지. 부질없이 재가 될지. 젊었을 적의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안쓰러운 마음과 원망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이후로 해를 거듭하며 아버지의 기일마다 납골당을 찾았다. 혼자 그곳을 찾아가서 우두커니 서있다 보면 아버지를 향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곤 했다. 첫 해에는 그날의 눈물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그게 당신이 안쓰러워서 흘린 눈물인지. 그런 당신의 아들인 내가 안쓰러워서 흘린 눈물인지. 끝내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듬해에는 대학 합격 이후에 함께 했던 술자리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보았다. 그날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어렴풋이 알았으면서도 굳이 육성으로 미안하다는 말 네 글자를 듣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쌓여, 이제는 용서를 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이 별개임을 안다. 속죄는 죄 지은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와 같은 크기의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용서하는 자는 죄지은 자의 뉘우침과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서 타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야 용서하는 사람이나 용서받는 사람 모두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매년 아버지의 기일에는 아버지를 찾아갈 예정이다. 먼저 원망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그를 용서해볼 생각이다. 비록 당신이 구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제는 당신에게 가닿을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해볼 생각이다. 그 다음에는 살아 생전에 당신을 용서하지 못했던 내 죄를 속죄하고 싶다. 그래서 4월에는 광주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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