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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Nov 23. 2020

윤종신이 아내에게 보내는 노래

나는 취향 호더다. 특히, 음악에 대해서라면 장르, 국가, 언어, 대중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듣는 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몇 번의 경험이 편협함을 허물었다. 한 때는 편견 때문에 듣지 않던 아이돌의 솔로곡1)에서 의외의 감동을 받아 한 달 내내 그 노래만 들었다. 언어가 낯설다는 이유로 꺼려졌던 태국 가수가 부른 노래2)를 듣다가 이국의 밤이나 이곳이나 외로운 사람의 마음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기도 했다.


 1) 우리 어떻게 할까요 - 첸

 2) flwr - cloudy and still


그나마 듣지 않던 게 클래식과 재즈였는데, 요샌 손열음3)과 조성진4), eddie higgins trio5)의 영상을 보면서 깊은 맛에 걸음마를 떼고 있다.


 3) Liszt : La campanella - 손열음

 4) Debussy : Claire de lune - 조성진

 5) Autumn Leaves - Eddie Higgins Trio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답변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이 떠올랐는지.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니고 꼭 답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어떻게든 답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이 또 문제다. 아집은 체질인 지라 주말 아침부터 노트북 앞에 앉아서 셀프 빌보드를 세우고 있었다.




'좋아하다'를 가장 근사치로 측량할 수 있는 건 '시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야?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좋아하는 감정의 크기를 어떻게 비교하는지가 선결되어야 한다. '좋아하다'는 태생이 비교하기 어려운 동사다. 비교하려면 객관적으로 측량 가능한 단위가 있어야 하겠지만, '좋아하다'는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계량화되기 난해한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로 시작된 난제는 생애 곳곳에서 위기상황을 초래해왔다. 엄마는 이렇게 좋고, 아빠는 저렇게 좋아서 두 사람에 대한 좋아함은 서로 모양이 다른데 어떻게 비교하라는 말인가. 뒤집어 생각해보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 결국 나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지는 나를 선택하며 버린 기회비용들로 밖에 증명될 수 없을 테니까. 어르신들이 연애시절에 그렇게 허구한 날 물에 빠져가며, "나랑 자기 어머니 중에 누구 건질 거야"라고 묻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도 충분할 수 없겠지만, '좋아하다'를 가장 근사치로 측량할 수 있는 건 '시간'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온전히 쏟았다면 그 시간이 애정의 크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지금껏 보내온 시간들의 축적물인 지금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에게 끌리고, 같은 시간선 위를 겹쳐 지나며 서로에게 결박될 것임을 알고 있다. 좋아한다는, 혹은 사랑한다는 감정은 커다랗고 포괄적인 감정이다. 그 커다란 감정의 경계선 안에서 믿다가, 서운해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납득하고 행복하며 요동치는 불규칙 운동을 할 텐데, 깊이도 방향도 예측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측량할 수 있는 건 시간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윤종신이다. 한 시절을 더 강렬하게 좋아했던 가수도 더러 있었지만, 윤종신만큼 오래 꾸준히 좋아한 가수는 없다.




처음엔 가수 윤종신을 좋아했다. 그의 구체적 찌질함(지질하다는 어감이 살지 않아서 찌질하다로 씁니다)이 내 모난 부분을 정확히 건드렸다6). 스웨터에 일어난 보풀처럼 뭉쳐있던 찌질한 부분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지나갔는데, 거기에 음악이 입혀지니 오르골 연주처럼 아름답게 포장됐다. 그러니 20대 초반에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찌질한 남자의 마음을 제일 잘 표현하는 게 토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오해다. 토이가 노래하는 건 호구고, 호구는 찌질남의 하위집단 중 가장 순수한 애들일 뿐이다. 찌질남 그 자체를 표현하는 건 윤종신이 최고였다. 윤종신은 찌질이라는 본위에 굉장히 충실하고 순도 높은 찌질함을 보여준다. 20여 년 우려낸 종갓집 찌질 감성이 어떻게 폭발했는지는 '좋니'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6) annie - 윤종신

 

그러다가 느닷없이 TV에서 재간을 떠는 예능인 윤종신을 미워했다. 요즘이야 부캐랍시고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지만, 그때는 진중한 발라드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깨방정을 떠니까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예능 초창기에는 본업도 소홀했었으니, 미움은 이유를 보태며 커져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였다. 여기저기서 얼굴을 비추는 그를 보다 보니까 깐족거리는 유머톤이 웃겨서 점점 찾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토라져서 등 돌리고 앉아있다가 마음이 풀리기도 전에 무슨 소릴 하는지 궁금해서 돌아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콘서트였다. 당연히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콘서트에서도 중간중간 멘트를 자주 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멘트를 아껴가며 콘서트 시간을 빼곡하게 노래들로 채웠다. 꾸준한 창작활동으로 부를 노래도 많고, 콘서트에서만 부를 수 있는 소중한 노래들이 꽤나 많아서 였다. 그가 음악을 대하는 진중함에 또 설득을 당했다. 




윤종신을 좋아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가사 때문이다. 인간 윤종신의 여러 가지 모습이 모두 좋지만 작사가 윤종신이 가장 좋다. 늘상 찌질함이야 말해 무엇하겠으며, 나이듦에 대해서 인간적인 고민을 담은 노래7)도, 가족에 대한 애절한 마음8)도, 진부하지 않은 언어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의 가사가 마음을 자주 울린다.  


 7) 나이 - 윤종신

 8) 엄마가 많이 아파요 - 015B(With 윤종신)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오르막길', '그대 없이는 못 살아', '기댈게' 이렇게 세 곡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을 담고 있다. 이제 막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혹은 함께 긴 세월을 보낸 후에 서로 다독이면서 건네는 말들. 얘네를 묶어서 "윤종신이 아내에게 보내는 노래"라고 마음대로 표제를 붙였다. 이 세 곡을 듣고 나면, 결혼도 안 한 나는 이미 금혼식을 앞둔 기분이 되곤 한다. 


윤종신이 아내에게 보내는 노래


'오르막길'9)은 2012년 월간 윤종신 6월호로 발표되었다. 이 때는 정인의 목소리로 불렸다가, 2015년 행보 앨범에는 본인이 직접 부른 버전을 수록했다. 당시 결혼을 앞둔 조정치와 정인 부부를 생각하면서 쓴 곡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윤종신이 직접 부른 게 더 좋다. 후렴구에서 감정이 고조되면서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함께 고생한 자신의 아내에게 전하는 노랫말 같아서 울컥하곤 한다. '오르막길'은 세 곡 중에서 가장 결혼생활의 이른 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오르막길처럼 힘들겠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정상까지 올라가 보자고 한다. 그 다짐에서 신혼부부의 풋풋함과 결연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지금의 사랑이 오래도록 신뢰를 쌓아가며 다른 모양으로 계속될 거라는 희망이 전해진다.


 9) 오르막길 - 윤종신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완만했던 우리가 지나온 길엔 달콤한 사랑의 향기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 일지 몰라
한 걸음 이제 한 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

한 걸음 이제 한 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크게 소리쳐 사랑해요 저 끝까지


'기댈게'10)는 2018년 월간 윤종신 9월호로 발표되었다. 오르막길을 앞두고 함께 숨을 고르던 신혼부부는 이제 중턱 즈음을 지나는 중이다. 함께하는 날들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고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지만 부단히 걸어야만 한다. 그럴 때 함께 걷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힘이 된다. 어깨에 기대어 잠깐 숨을 고른다. 그제야 당신도 나 못지않게 지쳐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당신이 내게 힘이 되는 만큼 나도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서로의 등에 기대어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다시 걷는다. 


노랫말에는 아름답게 꾸민 말도 없고, 평소 작사 스타일처럼 낯선 단어를 쓰지도 않는다. 평범한 멜로디와 어울리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면이 노래의 솔직한 어투와 잘 어울린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강한 척하거나 미화하려 하지 않고 힘든 대로 표현하고, 그러다 또다시 힘 나는 만큼 견뎌내는 평범한 남편이다. 그 평범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10) 기댈게 - 윤종신


쉬고 싶었어 기대고 싶었어 
고달픈 내 하루에 덩그러니 놓인 빈 의자 위에 그냥 잠깐 앉아 쉬고 싶었어
잠깐 니 생각에 숨 좀 고르면 한참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니가 있어서 기댈 수 있어서 도착하면 반기는 너의 얼굴 떠올릴 수 있어서
돌아보면 꽤나 멀리 잘 왔어 어디까지 가야 할지 모르지만 가는 게 맞대 다 그런 거래

변해가는 나를 봐주겠니 나도 널 지켜볼게 혹시 지쳐가는지
어떻게 항상 행복해 미울 때 지겨울 때도 저 깊은 곳에 하나쯤 믿는 구석에 웅크린 채로 견뎌
등을 맞대 보면 알 수 있어 우린 서롤 기댄 채 살아가고 있음을
그 편안함이 소중해 살짝만 뒤돌아보면 입 맞출 수 있는 거리
그렇게 지탱해줘 우리 날들에

고민 가득해 지새운 밤들에
안쓰러운 목소리 너의 눈빛 바라보기 미안해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앓던 마음 보이기가 싫었던 미련한 자존심 지켜주던 너

변해가는 나를 봐주겠니 나도 널 지켜볼게 혹시 지쳐가는지
어떻게 항상 행복해 미울 때 지겨울 때도 저 깊은 곳에 하나쯤 믿는 구석에 웅크린 채로 견뎌
등을 맞대 보면 알 수 있어 우린 서롤 기댄 채 살아가고 있음을
그 편안함이 소중해 살짝만 뒤돌아보면 입 맞출 수 있는 거리
그렇게 지탱해줘 우리 날들에


'그대 없이는 못살아'11)는 2010년 월간 윤종신 10월호로 발표되었다. 이 노래는 "윤종신이 아내에게 보내는 노래" 트릴로지의 완결 편이다. 셋 중에서 가장 완숙한 모습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하고 있고, 셋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죄다 꺼내놓다 보면 마음이 앞서 중언부언할 것 같아서 딱 두 가지만 얘기해야겠다. 먼저, 이 노래는 뮤직비디오가 진짜다. 진짜로 감동적이고, 진짜로 실제 부부의 사진을 보여준다. 뮤직비디오는 밤늦은 시간 퇴근하는 남자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면서 실제 부부의 사진들이 교차 편집된다. 부모님의 젊은 날 모습, 부모님의 부모님의 지금 모습, 한 발짝씩 요령 없이 걸어서 함께 낡은 부부의 모습들이 한 컷씩 지나며,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샘이 저릿하다. 나는 결혼을 해본 것도 아니지만 괜히 울음이 날 것만 같다. 


울음을 참다가도 언제나 같은 부분에서 울고 만다. 1절과 2절의 마지막은 "기어코 행복하게 해 준다"는 다짐으로 끝난다. 이 부분에서도 "기어코"라는 부사가 문제다. 윤종신은 이 부분을 마른 목소리로 꾹꾹 눌러서 부른다. 최루성 짙은 부사와 건조한 목소리가 만나 오묘한 감정을 건드린다. 지친 와중에도 꼭 지켜내야 할 약속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다짐 속에서 기어코 또 울고 만다. 


 11) 그대 없이는 못 살아 - 윤종신


세상이 버거워서 나 힘없이 걷는 밤 저 멀리 한 사람 날 기다리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도 나를 믿지 않아도 이 사람은 내가 좋대
늘어진 내 어깨가 뭐가 그리 편한지 기대어 자기 하루 일 얘기하네
꼭 내가 들어야 하는 얘기 적어도 이 사람에게만큼은 난 중요한 사람
나 깨달아요 그대 없이 못 살아
멀리서 내 지친 발걸음을 보아도 모른 척 수다로 가려주는 
그대란 사람이 내게 없다면 이미 모두 다 포기했겠지
나 고마워요 그대밖에 없잖아
나도 싫어하는 날 사랑해줘서 
이렇게 노래의 힘을 빌어 한번 말해본다
기어코 행복하게 해 준다

나 깨달아요 그대 없이 못 살아
지지리 못난 내 눈물을 보아도 뒤돌아 곤히 잠든 척하는 
그대란 사람이 내게 없다면 이미 모두 다 포기했겠지
나 고마워요 그대밖에 없잖아
나도 싫어하는 날 사랑해줘서
이렇게 노래의 힘을 빌어 한번 말해본다
기어코 행복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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